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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시대별 변천   분야별 변천   인물사   병원별 방사선과의 역사   유관학회 및 단체   방사선 의학산업
 
   대한X선검진협회
   
검진역사
  1940년대 초에 35mm 간접촬영기가 처음으로 국내에 도입되어 X선 집단검진이 시작되었으며 1942년 사단법인 조선결핵예방회(대한결핵협회의 전신)가 주동이 되어 도,시 학교, 보건소 등에서 실시되었다. 해방후 교도소 재소자중에 결핵환자가 많아 안치열(安致烈)과 김정진(金楨鎭)이 주축이 되어 집단검진을 시행하였고 특히 6.25 사변중 군인 중에 폐결핵 환자가 많이 발견되어 문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입소시 흉부X선 검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미 입대한 장병중 결핵환자를 색출하기 위하여 집단검진반이 편성되었으며 안치열이 이의 책임자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방사선의학연구소가 개설되면서 자궁경부암의 집단검진이 시작되었고 검진차량을 이용하여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동시에 흉부검진도 하게 되었다. 흉부 X선 집단검진이 점차 보편화되어 각급 학교, 직장, 산업장 등에서 정기적인 신체검사로 시행하게 되었으나 판독에 관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1945년 해방 후부터 1960년대 초(박정희정권)까지만 해도 국내 X선 필름과 현상약품은 물론 X선기계, 현상탱크, 행거까지 미군 군수물자의 유출로 해서 생긴 것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즉 부정물자가 없으면 하루도 "X선과" 업무가 불가능한 시대였다.
   
필름파동과 대한X선의료사업협회
  1960년대에 들어와서 X선필름의 수요가 늘어가자 필름의 부족으로 대학병원도 1주일분 이상의 재고가 없어 불안한 운영을 하고 있었으며 필름의 시중거래는 25매입 한 Box, 심지어는 한 장, 두 장, 낱장거래도 성행하는 시대였다. X선 기자재 특히 필름의 불충분한 공급과 가격의 불안정은 1960년대에 들어 더욱 심각하여졌으며 학회 집행부는 일찍이 정부에 외환배정의 증액, 관세 인하 등 가격 인하 및 안정적 공급을 위한 건의를 계속하였다. 특히 외환의 부족이 심각하였던 당시에 X선 필름에 대한 달러의 배정을 한정하였으므로 필름 가격이 너무 올라 진료면에 지장이 많았다. 필름의 정식수입이 필요해졌으나 정부 보유 외환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당시 해외 여행경비의 최고한도가 200$이었었다.) 충분한 외화가 배정되지 못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X선 필름으로 연간 약 20만불을 배정하여 분기별로 5만불의 달러를 분담하면 각 상표별 수입상이 1만불씩(코닥, 안스코, 후지, 두폰 등) 할당받아서 수입하여 도,소매로 팔아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 발생하였다. 악덕상인이 5개 수입상에서 들어 온 필름을 독점 매집 매점하여 두배로 비싸게 팔고 또 올리고 하여 방사선과 전문의는 환자에게 받은 수가가 300원인데 필름 한 장의 값이 300원이 되었고 할 수 없이 한 장 촬영하여 400원을 받게 되었다. 100원의 차익을 가지고는 생활은 고사하고 집세도 못 낼 실정이 되었다. 참고로 당시의 학회 이사들의 1년 회비가 300원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1963년 11월 11일 간사회의 회의록을 보면 ANSCO필름 배정 문제에 대하여 국제양행이 대한영상의학회에 배정한 필름을 전문의 1인당 14'x17', 10'x12', 8'x10'필름을 25매 한 박스씩을 지정된 가격으로 배정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영상의학회에서는 안치열회장 이하 간부들이 모든 노력을 다하였으나 사태의 호전은 보이지 않고 악덕상인의 횡포는 극에 달하였다. 학회 공식 기구에서 보사부장관에게 제출한 건의서는 다음과 같았다.
 
건의내용
엑스선 필름 구매외자(dollar) 배정액수가 부족하여 필름가격의 앙등으로 진료에 지장이 많습니다. 우리의 건의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1. 국 · 공립병원, 교육병원에 대한 film공급은 일정업자에게 위임하여 실비 공급케하고 관인수수료만 지급한다.
2. 소매가격으로 연간4등급하여 최저가로 공급하겠다는 업자에게 공급권을 줄 것.
3. 중간상을 배제하고 수입한 자가 지방까지도 송료와 포장료를 더하여직송 직공급한다.
4. 필름공급의 사후관리는 학회에서 행한다. 소매가와 공급방법도 공고한다.
5. 위반하는 업체는 학회에서 보사부로 통보하여 보사부 출입을 금지한다.
6. 가격 산정은 14 x 14인치 필름을 기준으로 한다.
  이상은 1964년 1월 27일 보사부장관에게 제출한 건의서의 내용이며 기타 국립.도립 병원장의 진정서도 많았으나 백안이 무효였다.
  그러나 사태는 계속 변화되어 종합병원은 물론 개업가에서는 사활문제가 달려 있게 되었다. 서울 시내 유지들이 종로 한일회관에서 비장한 각오하에 비상 대책회의를 열어서 金周完(국립대대표), 權泰洙(사립대대표), 趙炳熙(개업의대표)를 선출하여 사태수습을 요청 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권,조 3인은 보사부를 매일 출입하여 필름수급의 역학관계를 내사하여 2개월만에 해결책을 찾았으나 정부시책의 기밀이 누설되어 번번히 실패하자 전국적인 원성과 사회의 물의도 더욱 심해졌으며 정부로서도 난처하게 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업자와 내통하는 자가 있음을 알아내고 비상 수단을 쓰기로 정부당국과 합의했다. 방사선과 전문의로 하여금 정부가 인정하는 법인체를 결성하고 정부가 X선 필름의 수입에 필요한 외자의 배정(수입권)권을 법인체에게 위임한다는데 까지는 합의되었는데 문제는 이 내용이 유출되어 악덕업자의 방해와 내부자의 방해,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대한X선검진협회가 배정한 업자가 신의를 지켜주는가에 있었다. 1964년 10월 10일 대한영상의학회 총회에서 의료사업협회의 현상을 보고하였고, 이어서 정부의 시책을 임의단체인 학회에는 위임받을 수 없다고 하여 부득이 사단법인 대한X선의료사업협회(현 대한X선검진협회의 전신)를 정식으로 설립하게 되었다.(1964.12.2) 당시의 이사진은 이재규(李在珪), 강석린(姜錫麟), 김재섭(金在燮), 조병희, 김주완, 권태수 등이었다.
  곧 이어서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X선 필름수입용 정부보유불이 대한X선검진협회 명의로 배정되었는데 5만불 전액을 악덕상인이 아닌 검진협회측 수입상(현 신기사 이병원(李炳源)사장)에게 낙찰되어 필름의 수입이 이루어졌으며 신기사는 대한영상의학회에 동조하였기 때문에 원활한 필름수급이 재개되었으며 가격도 종전가의 45%로 결정 보았다. 그러나 당시 대한영상의학회장 안치열은 필름공급가가 수입원가에 비해 약간 비싸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대한X선의료사업협회와 대한영상의학회와는 관련이 없다고 1965년 전문지에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대한X선검진협회의 창립
  1965년 12월 22일 대한영상의학회 이사회에서는 당시 점차 증가하고 있는 집단검진자들에 대한 간접촬영 판독에 관하여 방사선과 전문의가 직접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결핵협회, 보사부, 노동청, 보사분과위원회에 건의, 진정키로 하였으며 참여의 한 방식으로 "reading center"를 설치하는 것이 어떠한 가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1966년 2월 19일 대한영상의학회는 25만명의 일반공무원 간접촬영 사진의 판독을 대한영상의학회 사업으로 봉사하기로 의결하였으며 1966년 4월 15일 이사회에서는 당시 매당 5원이었던 간접촬영 판독료를 10원으로 인상키로 하고 10원 이하를 받는 회원은 징계하기로, 또한 노동청에 전문의 도장을 등록시켜 도장이 도용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비협조적인 회원은 노동청에 통지하여 추후에는 판독하지 못하도록 하고 직촬소견료도 200원 이상으로 할 것을 결의한 바 있다.
  1966년 7월 22일 대한영상의학회 이사회에서는 X선집단검진쎈터(가칭)에 관한 건을 토의하였으며 X선간접촬영판독위원회를 대한영상의학회 안에 두고 전문의의 단결과 권익을 옹호하도록 하며 김희섭, 권태수, 김주완이 이를 담당키로 하였다.
  1968년 1월 6일 대한영상의학회 이사회에서는 "대한X선진료지도회(가칭)"조직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며 1968년 1월 21일 대한X선의료사업협회 임시총회가 개최되어 새로운 사단법인을 구성하는 것 보다 의료사업협회의 정관을 개정하여 새로운 목적사업을 시행하기로 의결하고, 동년 2월 2일 정관개정을 신청, 2월21일자로 "사단법인 대한X선검진협회"로 보건사회부 장관의 정관개정 허가를 얻어 현재의 대한X선검진협회로 정식 출범하였다 첫 대한X선검진협회 임시총회가 1968년 3월 3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구내식당에서 22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검진협회의 판독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이 논의되었다. 아울러 이 자리에서 대한영상의학회 전 회원이 검진협회 구성원으로서 판독사업 운영의 적정을 기하기 위한 9개항의 "X선 판독사업 운영에 관한 결의서"를 작성 서명하였다. 내용은 1. 판독은 이중판독으로 한다. 2. 2차 판독은 중앙판독위원회에서 지정하는 회원이 한다. 3. 중앙판독위원회는 판독업무를 신속히 하기 위하여 균등히 회원에게 배정하고 매년 정기총회에서 이 실황을 보고한다. 4. 판독보고서를 당국에 제출할 때 반드시 본 협회의 확인 날인을 받아 제출한다. 5. 판독결과 보고서는 별지 양식의 용지를 사용한다. 6. 판독기간은 20일간을 원칙으로 한다. 7. 판독요금은 매당 20원으로 결정하고 일정비율의 금액을 협회 운영경비로 납부한다. 8. 본 판독보고서는 판독요금 지불과 동시에 협회에서 교부한다. 9. 국가 또는 공공단체의 판독은 중앙판독위원회에서 한다.
  초대회장에 주동운(朱東雲), 부회장에 김희섭(金熙燮)과 권태수가 선출되었고 이사에 김주완, 김재섭, 박용휘(朴龍輝), 최병숙(崔炳肅), 유호준(柳浩濬), 박수성(朴琇誠)이 감사에 천세영(千世榮), 장기완(張基完)이 위촉되었다. 협회직원으로는 사무처장에 김동화(金東華), 직원 정문석(鄭文錫)이 채용되었다. 첫해 서울에 X선사진 중앙판독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울, 경기, 강원, 충남, 충북을 직접 관리하였으며 경북, 경남.부산, 전남북지부 등 3개 지부가 구성되었고 각각 지부장에 서철성(徐哲星), 윤종덕(尹鍾悳), 권충식(權忠植)이 위촉되었다. 또한 산업보건협회와 노동청 주최하에 개최된 각 도검진반 강연회에 권태수, 박용휘, 한만청(韓萬靑), 사무국장 김동화가 참가하여 강연 및 계몽을 실시하였다.
  1968년 첫해 검진실적은 212,581명으로 이중 서울이 113,580명으로 과반수를 넘었고 1969년에는 검진실적이 354,179명 (서울 166,833명)으로 전해에 비하여 50%이상 신장하였다.
  1969년 경기(지부장; 여운붕;呂雲鵬), 전북(지부장; 양해생;梁海生), 충남북(지부장; 이면상;李冕相) 등 세 곳의 지부를 확충하였고 당시 판독료는 20원이었다. 이중 본부 회원의 경우, 1차 판독료 7원, 협회배정 1차 판독료 3원, 2차 판독료 3원, 자금적립금 5원이었으며, 지부의 경우 본회 납부금 5원, 판독료지불 및 지부운영비 15원으로 결정하여 판독수당의 지급에 융통성을 두었다.
  1969년 회원은 입회원서와 함께 입회비 1,000원, 연회비 2,000원, 계 3,000원을 납부하였으나 1970년대 중반 입회비와 연회비를 통합하여 5,000원으로 인상하였으며 입회원서를 폐지하였고 회비는 현재까지 동결되어 있다.
   
대한X선검진협회의 위기
  1971년 8월 일반건강진단기관협의회(일기협) 발족 후 정부,보건단체 및 대한X선검진협회간에 사업협조에 있어서 크고 작은 문제가 속출하였으나 임기응변으로 대처해 나갔었다. 1971년 X선 판독권을 놓고 결핵전문의, 내과전문의와 방사선과전문의와의 사이에 마찰이 빚어졌으며 X선필름 판독의 권한은 방사선과 전문의의 전유물이 아니며 의사면허를 가진 자는 판독에 있어서 평등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자 급기야는 노동부와 보사부의 공식의견을 요청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대한의학협회에 의학계의 공식의견을 요청하게 되어 사안은 "방사선과"의 사활문제까지 파급될 사태에 이르렀다. 대한의학협회의 의무위원회에 X선 검진필름의 판독은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결말을 짓기 위해서 공식 공청회를 개최키로 하여 의무위원회에 결핵협회,내과학회,병원협회, 그리고 대한영상의학회 대표를 따로따로 출두하여 의견을 개진 하였다. 결론은 방사선과 전문의가 타당하다고 대한의학협회에서 정부로 회신하는 개가를 올렸다. 대한의학협회는 의무위원회를 열고 X선 필름의 2차 판독은 종전대로 방사선과전문의가 실시토록 해야 한다고 보사부 질의에 답변하게 되었다. 보사부는 의료심의위원회를 개최하여 1차 판독은 방사선과 전문의가 맡아서 하는 것을 원칙적인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대한병원협회에서는 이의를 제기 2차 판독의 무용을 건의하였으나 보사부는 판독권을 둘러싼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산업장 집단검진의 경우 2차 판독은 방사선과 전문의가 실시토록 조정할 것을 노동청에 제시하였다. 당시 방사선과 전문의의 판독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대한의학협회에 대표로 조중삼(趙重參), 권태수, 김재섭, 김주완, 안병선, 최병숙, 박용휘 등을 파견하였다. 1973년도 근로자 건강진단 실시요령에 X선 필름판독의 경우 1차 판독을 결핵전문의도 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1973년 4월 30일 검진협회 이사회에서 금년도 소요금액(사무비)이 확보될 때까지 검진X선 판독수당 지불보류를 결의하였다. 결과적으로 1972년 591,156명이었던 검진실적이 1973년에는 432,765명으로 약 30% 가까운 감소를 보였다. 1974년에는 결핵전문의의 판독권은 없어졌으나 검진협회를 경유하여야 하는 조항이 삭제되어 검진협회의 존립위기에 처하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검진협회 집행부의 끈질긴 노력과 회원들의 일사불란한 협조로 검진실적은 다시 567,364명으로 늘었고 1975년에는 노동청 근로자 신검 X선 사진판독요령이 방사선과 전문의 2인 또는 대한X선검진협회(방사선과 전문의 2인)판독으로 변경되어 다시 판독을 대한X선검진협회에서 하도록 하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그 후에도 매년 한 차례씩 있는 집단검진 실시요령이 정부에 의하여 발표될 때마다 각종 이익집단의 반격이 계속되었는데 이것은 대한X선검진협회 목적사업(전문의 권한문제)의 추진에 장애물이었으며,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판독권을 지키려는 노력은 대한X선검진협회 업무의 태반을 차지했다.(표 6-2-1.)
  표 6-2-1. 근로자 건강진단 X선필름 판독요령의 주요 변천사
 
연도 근로자 건강진단 실시요령 (X선 필름 판독)
1973 1차: 방사선과 전문의 또는 결핵전문의 2차: 방사선과 전문의
1974 방사선과 전문의 2인
1975 방사선과 전문의 2인 또는 대한X선검진협회(방사선과 전문의 2인)판독
1976 1.X선필름은 두번 판독하여야 한다.2.1차 판독은 방사선과 전문의가 판독하여야 하며 제2차 판독은 대한X선검진협회에서 하여야 한다.
1977 X선 필름의 판독은 2회 하여야 한다. 제1차 판독 : 방사선과 전문의, 제2차 판독 : X선검진협회(동지부)의 방사선과 전문의2인 이상의 집단판독. 다만 방사선과 전문의 3인 이상 있는 대학병원 및 종합병원에서 신검을 실시한 경우에는 2차 판독을 당해병원 방사선과 전문의 2인이상의 집단판독으로 종결할 수 있다. 이 경우 1차 판독을 한 방사선과 전문의는 2차 판독에 참여할 수 없다
1978 판독은 1회에 한하며 방사선과 전문의 2인 또는 대한X선검진협회(방사선과 전문의 2인)의 판독을 받는다
1992 방사선과 전문의 2인이 상주하지 않는 병원에서 검진을 실시한 경우 X선판독은 대한X선검진협회에서 하여야 한다.
1995 일반 근로자 건강진단 사업의 관할관청이 노동부에서 보건복지부로 이관되고 위해작업장의 특수건강진단 업무만 노동부에서 관할한다.
   
대한X선검진협회의 활동
 
1. 판독료의 변화와 검진실적
  1968년 대한X선검진협회 창립당시 판독료는 20원이었으며오래동안 인상율을 낮게 유지하였으나 1990년 이후 대한영상의학회 창립50주년기념사업 등을 위하여 비교적 높은 인상율을 보였다. 판독료 인상추이와 연도별 검진실적은 아래와 같다.
  표 6-2-2. 판독료 인상 추이
 
연도 금액 연도 금액 연도 금액 연도 금액
1968년 20원 1969년 20원 1970년 20원 1971년 25원
1972년 25원 1973년 25원 1974년 30원 1975년 30원
1976년 30원 1977년 40원 1978년 40원 1979년 50원
1980년 70원 1981년 100원 1982년 120원 1983년 140원
1984년 160원 1985년 220원 1986년 260원 1987년 280원
1988년 300원 1989년 340원 1990년 370원 1991년 450원
1992년 500원 1993년 550원 1994년 600원 1995년 660원
1996년 700원 1997년 740원 1998년 740원 1999년 740원
  표 6-2-3. 연도별 검진실적: ( )은 유소견자 수
 
연도 검진실적 연도 검진실적 연도 검진실적
1968년 212,581(10,190) 1969년 381,813(16,718) 1970년 475,882(17,473)
1971년 537,156(19,473) 1972년 591,826(20,655) 1973년 432,765(11,961)
1974년 567,364(15,087) 1975년 735,798(23,494) 1976년 1,323,950(48,269)
1977년 1,593,091(58,342) 1978년 1,687,073(54,859) 1979년 1,707,036(49,390)
1980년 1,701,630(53,442) 1981년 1,670,467(51,984) 1982년 1,507,980(51,505)
1983년 1,722,580(64,500) 1984년 1,737,363(59,429) 1985년 1,933,045(64,134)
1986년 2,213,306(73,741) 1987년 2,423,274(83,348) 1988년 2,501,460(89,348)
1989년 2,470,090(85,464) 1990년 2,382,372(88,222) 1991년 2,478,032(87,557)
1992년 2,503,546(92,826) 1993년 2,413,729(88,633) 1994년 3,155,323(94,134)
1995년 2,588,481(135,046) 1996년 2,773,377(138,164) 1997년 1,957,789(102,571)
1998년 2,006,806(          ) 1999년 진행중    
2. 공로 표창 및 감사패 수여
  1969년도부터 원활한 대한X선검진협회 사업을 위하여 유공자 표창을 시작하였으며 첫해에는 본부 부회장 권태수, 이사 김재섭과 부산.경남 윤종덕 지부장, 경기 여운붕지부장, 충남북 이면상 지부장, 서울회원 조병희가 표창을 받았고, 비회원으로는 강원도 영월 대한중석상동광업소 부속병원 방사선과 기사 전영흘에게 공로표창장을 수여하였다. 1970년에는 서울 안병선, 경남.부산 김병수(金炳洙), 충남북 최영윤(崔榮潤), 경북 우원형(禹元亨)이 1971년에는 전남 권충식, 전북 양해생, 1972년에는 부산.경남 김병수에게 공로표창장이, 1973년에는 성신의원 정호암원장, 경일의원 강창의원장과 X선기사 임경빈외 4명에게 감사패가, 검진협회 참사 정연학(鄭然鶴)에게 공로패가 수여되었다. 1974년에는 양해생, 오장석(吳長錫), 조병희, 윤종덕(尹鍾悳), 김주완, 박수성, 최병숙과 서기 김인홍(金仁洪)에게 공로패가, 후생의원 정병두원장, 성동의원 손점록원장과 순천향병원 건강관리부장 남승택에게 감사패가 수여되는 등 1970년대 후반까지 각종 표창이 있었으나 1980년대에는 없어졌으나 1997년에 사무국장 김인홍에게 20년 근속공로패, 여직원 전춘재에게 10년 근속공로패가 수여되었음.
3. 중앙판독위원회 구성
  대한X선검진협회 창립 직후 1968년 3월 처음으로 권태수를 위원장으로, 김희섭, 김주완, 박용휘, 장기완, 박수성, 김재섭, 김한석(金漢錫), 최병숙, 조병희를 위원으로 하는 중앙판독위원회를 구성하였으나 뚜렷한 역할은 없었다. 1977년 12월 검진협회 이사회에서 X선 판독에 이견이 발생되는 경우 검진협회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하여 중앙판독위원회를 재구성키로 하고 1978년 6월 김순용(金舜鏞), 박수성, 안병선, 김주완, 윤용규(尹鏞圭), 우원형, 박용휘, 윤종섭(尹鍾燮), 김희섭, 한만청, 박창윤(朴昌潤), 진수일(陳秀一), 김재섭, 강석린, 김기정(金基廷), 서원혁(徐原赫)의 16명의 위원으로 구성하였다. 1980년 부회장 1인을 위원장으로 하는 9인의 중앙판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위원장에 박수성, 위원에 안병선, 김주완, 진수일, 함창곡(咸蒼谷), 박창윤, 김재섭, 김종우(金鍾宇), 서원혁이 선임되었다. 1990년에 함창곡을 위원장으로 한창열(韓昌烈), 서정호(徐廷鎬), 임정기(任廷基), 윤엽(尹燁), 차인호(車仁鎬), 배상훈(裵湘熏), 서정수(徐廷守), 박석희(朴錫熙)를 1996년에 임정기를 위원장으로 이종범,이창준,김기환,윤엽,차인호,배상훈,서정수,박석희를 위원으로 하는 중앙판독위원회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외부지원활동
  1981년 학술지원 계획 우수논문 발표자 5명에게 20,000원씩 보조금을, 국제학회 참석자에게 여비 보조로 100,000원을, 또한 관계기관장 및 대한영상의학회장의 추천으로 영세근로자 10명에게 10,000원씩 100,000원을 지급키로 이사회에서 결의하였으나 지급여부는 불확실하다.
  1977년 12월 17일 전국 방사선과 레지덴트모임(회장; 정규병;鄭圭炳)에서 제2회 친선 정구대회에 100,000원(임대료 4면 5시간 40,000원, 상품,기념품 40,000원, 대회경상비 20,000)의 경비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중 50,000원을 지원하였다. 1978년에는 방사선과 레지덴트의 검진협회사업홍보세미나(다락원, 1박2일과정)에 경비보조 100,000원, 1979년 레지덴트 강습회 보조금 150,000원 지급 등 한때 전공의 모임에도 보조금을 지급하였으나 점차 전공의 수가 늘어 이를 중단하였다.
  1973년 1월 15일에는 대한X선검진협회가 사용하던 2,3층 사무실 중 3층에 대한영상의학회 회관을 개설하여 50,000원의 경비를 보조하였다. 1973년 3월 대한방사선사협회 학술연구비 50,000원을 보조하기 시작, 상당기간을 지원하였으며, 대한영상의학회에도 1974년 대한영상의학회 추계학술대회 경비 보조로 2,000,000원, 1977년에는3,000,000원을 지원하였으나 1978년 12월 이후 대한영상의학회와 대한X선검진협회가 합동이사회를 개최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한영상의학회의 행사를 검진협회에서 지원하게 되었다.
   
지부의 구성
  대한X선검진협회 창립당시 부산.경남, 경북, 전남북의 3개 지부가 구성되었고 본부에서 충남북, 강원, 경기를 관할케하였으나 이듬해인 1969년 경기, 전북, 충남북의 세 곳이 늘었고 현재는 본부외에 37개 지부가 구성되어 있으며 지부명칭을 도개념에서 군소도시 개념으로 1997년에 개칭함.(표 6-2-4.)
  표 6-2-4. 지부의 설립년도 및 지부장명번호
 
  지부명 설립년도 설립당시지부장 현지부장   지부명 설립년도 설립당시지부장 현지부장
1 부산 1968 윤종덕 이영일 20 부천 1988 김수미 한명환
2 대구 1968 서철성 서수지 21 의정부 1988 이희우 안병엽
3 광주 1968 권충식 김영철 22 천안 1991 김병태 김병태
4 인천 1969 여운붕 황주섭 23 안산 1993 전순애 전순애
5 전주 1969 양해생 이학송 24 성남 1995 김종건 김연중
6 대전 1969 이면상 박준식 25 안양 1995 백성모 백성모
7 수원 1973 장일정 장일정 26 이천 1995 김재원 김제현
8 마산 1976 제삼록 이원화 27 고양 1995 유윤정 유윤정
9 청주 1982 이길석 정진흥 28 구리 1995 문장호 문장호
10 안동 1983 남우선 권대홍 29 서산 1995 안영 안영
11 포항 1983 이용준 우원호 30 익산 1995 원종진 원종진
12 울산 1983 장혜순 이수동 31 군산 1995 오종현 오종현
13 목포 1983 서한태 서한태 32 순천 1995 박병환 박병환
14 원주 1983 양영자 김명순 33 여수 1995 서영준 서영수
15 제주 1983 이유근 이유근 34 평택 1995 정은석 윤영자
16 강릉 1984 한현수 태석 35 구미 1995 백대일 백대일
17 춘천 1984 김연 황우철 36 경주 1997 이성우 이성우
18 충주 1985 김호균 권오청 37 대천 1999 배금동 배금동
19 진주 1987 송익훈 서정혁          
   
검진협회 사무실의 이전
  1968년 대한X선검진협회 창립이후 사무실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방사선과 주동운 교수실(방사선치료실)에 두고 업무 수행1971년 10월 중구 을지로 6가 19-29 계산빌딩으로 사무실 이전1972년 12월 서울 중구 필동 1가 19-3 건물 2,3층으로 사무실 이전1973년 1월 15일 대한영상의학회(건물 3층으로)와 사무실 분리1974년 3월 검진협회 사무실은 중구 을지로 6가 19-29 계산빌딩 4층 519호실로 이전하였으며 1973년도 검진협회 사업실적 저조로 대한영상의학회 사무실은 폐쇄 1980년 3월 서울 중구 을지로 6가 18-12 덕수종합빌딩 238호로 다시 이전하고 1994년 10월 한국방사선의학재단이 자체 회관을 구입 대한영상의학회 사무실이 이전할 때까지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였다. 1995년 1월 중구 을지로 6가 18-172 상우빌딩 702호로 검진협회 사무실을 이전하였다.
  표 6-2-5. 사단법인 대한X선검진협회 역대 임원현황
 
역대 임기 회장 부회장 이사 감사
1 1968-1971 주동운 김희섭
권태수
김주완,김재섭,박용휘,최병숙,유호준,박수성 장기완,천세영
2 1971-1974 조중삼 안병선
권태수
김주완,김재섭,박용휘,최병숙,유호준,박수성
(교체이사:한만청,강석린,윤용규)
장기완,천세영
(장기완->안재두)
3 1974-1978 최병숙 안병선
김주완
박수성,김재섭,박용휘,한만청,윤용규,유호준 천세영,안재두
4 1978-1981 김순용 안병선
박수성
김주완,김재섭,한만청,최병숙,윤용규,박용휘
(교체이사:우원형진수일,서원혁,김종우)
천세영,안재두
5 1981-1984 김순용 우원형
윤용규
김주완,박수성,박용휘,박창윤,한만청,진수일
(교체이사:우원형진수일,서원혁,김종우)
안병선,류성열
6 1984-1987 박수성 서원혁
진수일
김순용,김주완,우원형,박용휘,한만청,박창윤
(교체이사:윤종섭,김재섭,안병선,김기정,김래준,
                   이면상,양해생)
윤용규,한창열
7 1987-1990 박수성 서원혁
진수일

김순용,김주완,우원형,박용휘,한만청,박창윤
(교체이사:윤종섭,김재섭,안병선,김기정,김래준,
                   이면상,양해생)

윤용규,한창열
8 1990-1993 박수성 한창열
함창곡
한만청,박창윤,박용휘,진수일,김건상,우원형 서원혁,이명욱
9 1993-1996 서원혁 함창곡
진수일
최기철
한만청,박수성,김춘열,한창열,김건상 장혜순,이창준
10 1996-1999 진수일 정원균
임정기
강덕식
함창곡,김건상,한창열,연경모,이종태 차인호,이재문
11 1999-2002 진수일 임정기
김상진
이영일
함창곡,김건상,한창열,연경모,안재두 차인호,이재문
   
기타
  1971년 대한X선검진협회 이사회에서는 본부 산하 X선진료소를 설치하자는 계획이 논의 되었으나 무산되었고, 1981년 4월 25일 임시총회에서는 "검진협회"라는 용어가 좋지 않다는 회원들의 지적에 따라 협회명칭을 "대한방사선의료협회"로 개칭을 검토하였다가 보류된 바 있다.
  1976년 4월 사단법인 대한X선검진협회 지부규칙(안)을 마련하고 지부장을 본부에서 임명 및 해임하였으나 점차 지부 자율에 맞기게 되어 현재는 지부장을 개선한 후 보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78년도 대한영상의학회 정기총회시 처음으로 기념품을 회원에게 배부 기념타올 700매를 구입한 바 있고 그 후 상당기간 검진협회 총회(대한영상의학회 총회 직후에) 개최시에 기념품을 배부하였다. 1982년에는 검진협회 직원 급여, 퇴직금, 여비 등에 대한 제규정을 제정하였고, 1982년부터 공무원 정기건강진단이 같은 요령으로 격년제로 실시되어 매 짝수해에 시행되고 있다. 또한 1982년 10월 대한X선검진협회보 제1권 제1호가 발간되어 "최신 의료 방사선장비의 국내현황 및 그 운영에 따른 문제점"의 특집을 포함 9편의 원고가 게재되었다.
  1984년 검진협회의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검진협회 차량을 구입하였다.
  1991년 11월 22일 노동부 요청에 의하여 대한영상의학회 주관으로 강남성모병원 강당에서 진폐판독 교육이 시행되어 전국 검진협회 지부에서 이에 참석하였고, ILO 표준필름을 복사하여 전국 지부에 배부하였다.
  1992년에는 의료보험조합연합회 가입 보험자 피부양자에 대한 성인병 검진이 시작되어 매년 실시되고 있으며 1993년부터 공무원의 피부양자 성인병 검진이 격년으로 시작되어 공무원 정기건강진단이 없는 홀수해에 시행되고 있다.
  1995년 그간 노동부에서 주관하였던 일반 사업장 근로자 건강진단 업무가 보건복지부로 이관되었으며 이를 의료보험관리공단에서 관리하며 의료보험비에서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특수 사업장 근로자 건강진단 업무는 계속 노동부에서 관리토록 하고 있다.
  일반 사업장 근로자 건강진단 업무가 보건복지부로 이관됨에 따라 새로운 실시요령이 작성되게 되었으며 그 단계에서 일반건강진단기관협의회(일기협)를 포함한 검진기관들로부터 X선 판독업무의 간소화를 위한 제언이 있어 이중판독의 필요성, 대한X선검진협회에서의 판독의 필요성등이 다시 거론되었다. 검진협회 집행부의 이론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검진협회에 다소 불리하게 실시요령이 제정되었다.
  현재 대한X선검진협회 본부 직원으로 사무국장 1명, 과장 1명, 여직원 4명, 운전기사 1명 등 7명으로 업무가 운영되고 있으며, 사무국장 정연학이 1996년말에 정년 퇴임하고 후임 사무국장 김인홍은 1971년 입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