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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시대별 변천   분야별 변천   인물사   병원별 방사선과의 역사   유관학회 및 단체   방사선 의학산업
 
   개원가의 연혁
   
초창기
  8·15 해방 당시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이부현(李富鉉)이 개업하고 있었으며 6·25동란까지는 개원의가 없었다. 일제시대 일본에 가서 공업기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방사선 기사로 활약하며 해방과 동시에 창립된 대한방사선의학회 부회장을 맡았던 박양규(朴良奎)가 6.25동란 후 서울역 부근에서 X선 기계를 취급하는 공업사를 열고 당시 시중에 유출되던 X선 기계들을 수리 정비하여 각 병원으로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1951년 그의 매부였던 김유형과 함께 종로에서 피카 30mA, 시멘스 등의 기계를 가지고 고려X선 촬영소를 개원하였으나 방사선과 전문의가 직접 상주하면서 투시나 판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의뢰된 X선 사진을 찍은 뒤 그 필름을 의뢰한 곳으로 그냥 보내주기만 하던 형태였다. 당시 적십자병원에서 의뢰된 흉부사진을 주로 찍었는데 이 당시 폐흡충증환자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그 후 1952년에 고려X선과로 개칭을 하고 이때부터 의사를 초빙하여 판독을 하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판독을 한 사람이 이북출신으로 검정의 출신의 정국진이었다. 일신상의 문제로 고려X선과는 김유형이 계속 운영을 하고, 박양규는 장안고려X선과를 다시 개업하여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조중삼(趙重參)을 초빙하여 판독을 의뢰하였다. 조중삼은 후일 본인 소유의 조중삼X선과를 근처에 개원하고 한동안 활동을 하였으나 이전부터의 장기간의 엑스선 피폭의 영향으로 백혈구감소증이 나타나 개업을 쉬게 되었고 나중에 대전에서 다시 개원하였다. 주동운(朱東雲)이 신신방사선과를, 김주완(金周完)도 1950년도 중·후반에 종로에 개업을 하였다. 고려X선과를 거쳤던 방사선과 의사들로는 1953년부터 1954년까지는 당시 수도의대(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과 및 결핵과장이었던 이재규(李在珪)가, 1955년에는 여운붕(呂雲鵬)이, - 이후 여운붕은 인천에서 시민X선과를 개업하여 상당 기간 활동을 하였다. - 1957년에는 변효현(卞孝鉉)이, 1958년에서 1960년까지는 김희섭(金熙涉)이 판독을 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말 조병희(趙炳熙)가 종로 3가에 조X선과를 개원하였다. 이 당시는 대부분의 종합병원 봉직의사들이 오후에는 자신의 의원을 개원하든가 다른 병원을 부업으로 도와주는 것이 상례로 인식되었던 시절이었던 만큼 방사선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업지역은 종로, 을지로에 국한되었다. 김정진(金楨鎭)은 1950년대 초반에 종로에서 잠시 개업을 준비하다 6.25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전남대학병원 방사선과장으로 부임하였다.
  이처럼 1950년에서 1960년대까지의 방사선과 개업은 종로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소수의 개원의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개원가에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환자들이 다수 찾아왔었다고 한다. 초기 개원가에서 사용하던 장비들은 피카 30,일제 Shimadzu, Siemens 등의 구형장비로 주로 유출된 물품이거나 일제시대부터 사용하던 오래된 장비들이었으나 차츰 새로운 장비들로 대체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소모품이 전혀 국내수급이 안되던 시대였으므로 필름이나 기계부품들 역시 유출된 부정 유입품이 주를 이루었다.
  부산에서는 1955년 이경용(李鏡龍)이 시청 앞에 X선과를 개업했다. 장비는 시중에 불하된 피카 30mA였다. X선의 불모지로 3-4개의 종교계 종합병원마저도 X선 시설이나 전문의가 없었던 때라 개업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X-ray는 이경용이라는 인식이 나돌 정도였다.
  대구에서의 방사선과 개원은 1950년대 방사선기사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방사선과 전문의로서는 김호균(金昊均)이 피카 30mA를 가지고 동인X선과를, 서석주가 역시 피카 30mA로 고려X선과를, 한일극장 건너편에 전종학이 Shimadzu 100mA를 가지고 전X선과를, 동산약국 건너편에 김석동이 피카 30mA를 이용하여 중앙X선과를, 김정근이 피카 30mA를 가지고 대구X선과를 개원하였다. 당시 개업의 형태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의뢰된 사진을 찍는 정도였다. 1953년 김순용(金舜鏞)이 포정동에서 동인X선과의원을 개원하였으나 1954년 9월 경북대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57년 박성열은 피카 50mA를 가지고 개원하였다. 1959년 이길석(李吉錫)은 국산조립기계를 가지고 이길석X선과를 개원하였다.
  대전에서는 1950년대 방사선기사들에 의해 3-4곳에서 X선과 의원이 개원하고 있었다. 의사로는 함흥의과대학 X선과에 재직했던 정국진이 검정의로 1950년 후반에 대전에서 시민X선과를 개원하였다.
  광주에서는 전남대학병원 기사장 김광철에 의하면 해방 후부터 6.25사변 직후까지 방사선기사들이 방사선과를 개원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방사선과 의사에 의한 개업은 1955년 전남대학병원 김정진이 야간개업의 형태로 개업한 것이 처음으로, 낮에는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밤에는 개업의로서 일을 했었다. 이름이 동인의원이었는데 이는 조중삼이 방사선과 전문의사, 즉 동인(同人)들이 개업하는 것이니 의원이름을 "동인"으로 제의함으로써 김순용, 김정진은 물론 안치열(安致烈)도 같은 동인X선과로 각각 개원하게 되었다. 1956년 김정진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당시 전남대학교 방사선과에서 강의담당 조교로 있던 천명철(千命哲)이 동인의원을 맡게 되었다. 동인의원은 1958년 김정진이 귀국하여 다시 일하게 되면서 천명철은 국내조립 X선기기를 가지고 천명철방사선과를 개원하였다. 전주에서 최초의 개원은 소아과를 겸한 양과 전문의였던 양해생(梁海生)으로 1959년 12월에 해방당시 일본인이 남기고 간 Simadzu 간,직촬기 2대를 가지고 시작하였다. 이중 1대는 나중에 조중삼의 요청에 의하여 조중삼에게 양도하였다고 한다. 이 기계는 일본인들이 집단 검진에 이용하던 것으로서 원래 30mm 필름을 이용하는 간촬 전용이었으나 튜브를 조정하면 직접촬영이 가능하였다고 하며 개업 초기 이 기계를 가지고 주로 흉부와 골 촬영만 하였다고 한다. 인천지역의 개원가는 검정의 출신인 여운붕이 1950년 말 신포동에 시민X선과를 개원한 것을 시작으로 당시로는 방사선과에 대한 개념이 미미하였고 이 지역의 방사선과에 대한 인식은 1980년대까지 답보상태였다.
  위와 같이 1950년대 초기에는 기사들이 X선 기기를 설치하여 개업을 하였으며 1950년대 중·후반기에는 방사선과 의사들에 의하여 이중개업의 형태로 개원하였고 전국적으로는 20여명의 방사선과 의사들이 개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1960년대
  1960년대에는 우리 나라 의사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던 시기였으며 특히 방사선과를 전공하던 의사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의사의 수급에 문제가 있어 개원의는 별로 증가되지 않았다. 서울지역에서는 1962년 박정옥(朴貞玉)이 고려X선과를 인수한 뒤 AID차관을 얻어서 웨스팅하우스 300mA를 도입하였는데 그 당시로는 최신형의 장비였다고 한다. 같은 해 황중숙(黃重淑)은 종로 5가에 제일X선과를 개원하였는데 100mA기계를 이용하여 출발하였다. 김용현(金龍鉉)은 미국에서 공부한 뒤 잠시 수도의대에서 근무하다 1963년 종로 2가에서 GE 200mA를 가지고 김용현방사선과를 개원하였고 위투시와 단층촬영을 시행하여 당시로는 상당히 성공하여 안국동 한국일보사 옆에 자체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63년 가톨릭의과대학을 사임한 안치열이 을지로 1가에서 동인X선과를 개원한 적이 있었다. 부산에서는 김래준(金來俊)이 1961년 한국 최초로 Picker 300mA의 투시 spot자동촬영장치를 도입하여 국제X선과를 개원하여 성업을 이루었고, 1966년에는 이경용이 부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TV투시장치를 도입하여 명실공히 부산 X선과 개업의 제1인자로서 확고부동한 명성과 업적을 남겼다. 윤종덕(尹琮悳)은 1961년에 개원하였고, 신승우(申勝雨)는 1966년에 부산대학교를 사직하고 남포동에서 GE 200mA로 개원하였으며, 성창수(成昌洙)는 1967년에 개원하여 이들은 부산 방사선과 개원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구에서는 1962년 박진우(朴鎭雨)가 GE 300mA로 개원하였으며, 1968년 김순용이 다시 경북X선과의원을 개원하여 1970년 GE 500mA에 Image Intensifier를 장착하여 위투시를 위시한 여러 검사를 수행함으로써 개원가의 활력과 면모를 일신하였다.
  1960년대는 각급 병원에서 묵시적으로 이중개업을 용인하던 시기로서 대개의 지역에서 대학병원 혹은 도립병원의 과장급 의사들이 이중개업을 하였으나 대전지역에서는 이중개업이 없었다고 한다.
  광주에서는 1960년대에 새로 개업한 개원의는 없었으며 목포에서는 1962년 서한태(徐漢泰)가 Picker 30mA를 가지고 개원하였다.
   
1970년-1985년
  1977년 7월 1일 의료보험의 도입은 개원가에도 큰 변혁을 초래하게 되었다. 500인 이상 근로자가 고용된 사업장 직원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시작된 초창기에는 큰 영향이 없었으나 1979년 공무원 및 사립교원으로 확대되는 등 점진적으로 대상인원이 늘어가면서 개원가의 수입면에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하였다.
  1982년 8월 속리산에서 전문의 연수교육이 끝난 뒤, 지방 개원의들인 이면상(李冕相; 대전), 이길석(李吉錫; 청주), 권충식(權忠植; 광주), 서한태(목포), 이진영(李畛永; 대구), 제삼록(諸三祿; 마산), 김래준(부산) 등이 모임을 갖고 전국 방사선과 개원의 모임을 창설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당시 전국 개원의 수는 약 80인이었으나 이렇다할 모임이 없어 개원의들의 의견 수렴이 될 수 없었고, 봉직의로 구성된 학회 집행부가 의료보험을 포함한 학회 정책결정에 개원가의 특수여건이 반영되고 있지 못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9월 25일 부산에서 「한국방사선과의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이면상, 부회장에 김래준, 총무에 박한규(朴漢圭; 대전)가 선임되었고, 지역간사로 윤용규(尹鏞圭; 서울), 안관식(安寬植; 경기,인천,강원), 채인원(蔡仁源; 충남북), 양병철(楊秉喆; 전북), 박흥일(朴興一; 광주,제주), 이진영(대구,경북), 김대헌(金大憲; 부산,경남)을, 감사에 안병선(安炳善)과 서한태를 선임하였다.
  1982년 정기총회에서 개원의 부회장 1인을 둘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하였으며 이면상이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전문의 연수교육의 주제를 개원의 모임에서 선정하도록 하여 1983년 골관절질환의 방사선학을 주제로 전문의 연수교육이 실시되는 등 상당기간 단순촬영을 주제로 선정하였으나 1980년대 후반에 참석자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봉직의를 위한 주제로 바뀌었다.
  2-3년 후 한국방사선과의사회의 전국규모 모임은 없어졌으나 각 지역의 개원의 모임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개원의 부회장이 상임이사회에 참석함으로써 학회 운영에 개원의 입장이 잘 전달되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 사대문안에서 외각의 중심지역인 영등포, 신촌, 청량리, 강남, 미아리 쪽으로 개업지역이 이전되면서 서울 전 지역에서의 활발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70년 초 김효린(金孝麟)은 청량리에서, 1975년에는 윤용규와 김재창(金載敞)이 영등포에서 개원을 하였다. 윤용규는 1987년 1월 개원의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개원의 모임을 새로이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개원의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고 최근에는 개원을 청산하고 노원을지병원에서 봉직의 길을 걷고 있다. - 개원의 모임은 3개월마다 모여 강의와 개원의 간의 정보교류와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 1991년 6월 김재창이 새 건물을 신축하여 개원한 영등포 진단방사선과의원은 전신용 CT, MRI(GE 0.5T), 초음파기기 및 최신 X선 촬영기들을 설치하고 3인의 진단방사선과 전문의를 채용하여 시작하였다. 그후 나선형 CT와 초음파기기를 추가 설치하고 현재 6인의 방사선과 의사와 1인의 내과 의사가 활동하는 초대형방사선과로 성장하였고 1994년 법인으로 전환하였다. 이재은(李載垠)은 1978년 3월 성동구 왕십리 로타리에서 성동방사선과 개원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1989년에는 초음파를 보강하여 운영중이다. 이명욱(李明旭)은 1978년 강남구 논현동에 영동방사선과를 개원하였다가 1992년 현재의 혜화동위치에 전문의 2인, 첨단 CT와 MR기기를 보강하고 혜화방사선과로 개명 개원가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안재두(安在斗)는 청량리 미주상가내에 1979년 3월 개원하여 1986년 초음파를 시작하였고 1994년 9월 전신용 CT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최두석(崔斗石)은 1979년 3월 미아 삼거리에 최두석방사선과를 개원하였고 1993년 3월 현재의 수유리로 이전하였다. 그는 윤용규의 후임으로 현재 개원의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 대한방사선의학회 개원의 부회장이다. 이영해(李玲海)는 1980년 6월 서대문구 신촌 로타리에 개원하였고 1990년 8월 전신용 CT를 도입하였다. 그녀는 1991년 4월부터 3년간 서울시 의사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94년부터 마포구 의사회 회장으로 맹활약하고 있어 여의사들에게 귀감이 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도행(李道行)은 1980년 11월 YMCA 건물에 있던 김홍수의 방사선과를 인수하여 이도행방사선과로 출발하다 최근 임상병리를 같이 운영하는 서울의과학연구소로 개명 개원하고 있다. 하해구(河海求)는 1983년 라춘섭이 경영하던 서대문구 신촌 로타리의 신촌방사선과를 인수하여 개원중이다. 서울지역의 개원의 중 최두석, 이영해, 황중숙, 이중석(李重錫), 조정제(趙政濟) 등은 개원의를 대표한 의료보험조합연합회 비상근심사위원으로 의료보험 심사업무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부산지역에서도 다른 지역의 개원의들과 마찬가지로 1950, 60년대 개원의들이 장비의 개선이나 신축건물로 이전하는 현상이 많았다. 김래준은 개업중도에 병환으로 일시 휴업하였다가 1973년 현 위치에 건물을 신축하고 1975년 Siemens 500mA를 도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윤종덕은 1972년에 5층 건물을 신축 이전하여 도시바 500mA를 도입해서 착실한 개업기반을 다졌으며 1993년 폐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성창수는 개업 만 10년인 1977년 일신상의 이유로 마산으로 옮겨 경남X선과를 운영하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1993년 서갑원X선과 자리를 인수받아 인제방사선과로 재출발했다. X선과 전문의 배출이 많아지고 각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의 인력수급도 안정되어 가던 1970년대에 부산에서는 중견 전문의들이 대거 개원의로 진출하였고 새로 개업을 시작한 사람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서갑원(徐甲源)이 1970년 양정동 자택에서 개업했다. 개업은 날로 번창하였으며 최신 X선 장비를 속속 증설하고 1991년에는 건물을 증축하는 등 매우 의욕적이었다. 임종수(林鍾修)는 1971년 서면에서 개업했다. 1982년경 내과전문의와 합작하여 부산 최초로 개인종합검진센타를 개설하였는데 부산에서는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1985년 일반가정의로 전과했다가 1990년부터는 봉직생활에 들어갔다. 1976년 서면에서 제일X선과를 개업한 이철세(李哲世)는 2-3년후 대정동으로 이전 1985년까지 성업하다 그 후 괴정동 소재 성모병원의 독립 채산제로 X선과를 운영하였다. 1992년 다시 개업하고 현재 사하구 요지에 종합병원건물을 신축 중에 있다. 김진국(金鎭國)은 1977년 부산을 떠난 중앙동의 이경용X선과의 자리에서 1980년 부산전매지청 앞으로 건물을 마련하여 중앙X선과를 개원하였다. 최성욱(崔成旭)은 1977년 보수동에서 개업했다. 그는 1987년 여러 과의 합작으로 광안동에 세강병원을 설립하고 그 곳에 몸담고 있다. 이경용은 1977년 서울로 올라가 을지병원, 강남성심병원 등에서 봉직하다가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하였다.
  정만균(丁萬均)은 1980년 서면 로터리에 정만균X선과를 개업하였다. 김대헌(金大憲)은 서면 전화국 앞에서 개원해 Brain CT를 도입하여 설치하였다. 활동적인 성품에다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부산의 각종 X선과 모임의 총무직을 전담해 왔다. 현 부산의사회의 기획이사직도 맡아 광범하게 활동하는 부산X선과 전문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1983년에는 정래원(鄭來沅)이 동래 주안동에 정래원X선과를, 김정희(金貞姬)는 괴정동에 고려X선과를, 배 철(裵撤)은 서면에서 배철X선과를 개업하였다. 한 해에 2인의 여성 개업의 첫 출현은 부산X선 개업사의 획기적인 면이었다. 배 철은 개업할 때 이미 동위원소 Camera까지 구비하였고 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신용 CT촬영기를 도입하였다. 대구에서는 1971년 9월 이진영이 세기X선 기기를 가지고 대구X선의원을 개원하였고, 그 해 11월에는 대구시내 개원가의 김순용, 박성열, 박진우, 이길석, 이진영 등이 모여서 개원의들의 월례집담회를 시작하였다. 또 대구동산병원장을 지낸 서철성(徐哲星)이 1974년 Toshiba기계를 가지고 서철성X선과의원을 개원하였다. 1974년 김순용이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옮기면서 공백이 생긴 경북X선의원을 오장석(吳長錫)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82년 3월 서준수(徐俊洙)가 서준수X선과를 개원하면서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개업가에 초음파진단기기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 라우연(羅雨淵)이 제일방사선과의원을 개원하였고 대구의 개원의들 중에서는 최초로 1986년 9월 CT를 설치하였으며 1989년 12월 GSM-500 모델의 MRI장비를 가동하였다. 1983년 11월 박삼균(朴三均)이 한일방사선과를 개원하였다. 대전에서는 박준식(朴俊植)이 1975년 박준식X선과의원을 개원하였다. 조중삼은 서울에서 X선과의원을 하다가 1974년 대전으로 이전, 중앙방사선과로 개원을 하고 작고하기 전 1978년까지 대전지역사회의 방사선과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한규(朴漢圭)는 조중삼의 중앙방사선과를 인수하여 개원하였는데 인수받은 기계가 GE제품으로 위장투시가 가능한 기종이었다. 박한규에 의하면 그 당시 위장투시를 한 번 하는 데에 3만 5천원으로 지금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가였고 인건비가 얼마 나가지 않아서 개원가의 형편이 괜찮았다고 한다. 1979년에는 채인원이 개원하였고 1984년에는 김연진(金演鎭)이 개원하였다. 광주전남지역에서는 최은식(崔垠植)이 1971년 최방사선과를, 1975년경 오성렬(吳成烈)이 오성렬방사선과를, 1976년 권충식이 피카 200mA로 호남방사선과를, 1979년 박흥일이 도시바 500mA로 제일방사선과를, 같은 해 한정수(韓釘洙)가 동아500mA를 가지고 광주방사선과를, 1980년 김광선(金光善)이 Shimadzu 500mA를 가지고 중앙방사선과를 광주에 개원하였다.
  1985년에는 허 돈(許 敦)이 무등방사선과를, 송옥자(宋玉子)가 한국방사선과를 개원하여 1970년-1985년까지 8인의 방사선과의사가 광주지역에서 개원을 하였다.
  1983년 서영준(徐永俊)은 도시바 500mA를 가지고 여수에서, 1984년에 이장식(李章植)이 동아 500mA를 가지고 목포에서, 같은 해 순천에서는 전현우(全鉉禹)가 도시바와 동아 500mA를 가지고 개원하였다.
  광주전남지역의 약사 중 특기할 만한 일은 개원의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서 검진협회가 확립되기 이전부터 지회를 설립하여 단합된 노력으로 검진협회 활동, 집담회, 보수교육, 기타 친목활동을 해오고 있었으며 초대회장이었던 천명철에서 10대 회장인 현 강형근(姜炯根)에 이르기까지 지회의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하여 적극적인 노력과 열성을 보이고 있다. 전라북도의 전주지역에서는 이경범(李景範)이 1971년에 개원하여 활동을 하였고 주로 위투시를 많이 하였다. 양병철(梁秉喆)은 1978년부터 개원을 하였으며 집담회를 주도하여 새로 도입되는 방사선기기 및 시술방법을 소개하는 등 개업의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신안 마이산 앞에 신안병원을 개원하여 한지 지역의 의료봉사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에는 오종현(吳鍾鉉)이 군산에 개원을 하였고, 같은 해에 이후용(李厚溶)이 이리에서 개원하였다. 이 지역의 방사선과 의사들의 모임은 검진협회 지부로서 명맥이 유지되다가 1985년 최기철(崔基鐵), 김종수(金鍾壽)의 주도로 정관을 작성하고 대한방사선의학회 전북지회가 창립되자 이후 검진협회 기금을 공동관리하면서 각종 집담회, 초청강연 연수교육 등을 매월 개최하고 있으며 봄 학회 및 전문의 연수교육 참가시 모든 비용에 대하여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다.
  인천지역의 개원가는 천세영(千世榮)이 인천지역에서 2번째로 1973년 경동에서 천세영방사선과를 개원하다 1985년 병원을 그만두고 1983년부터 경기간호전문대학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980년에는 황주섭(黃胄燮)이 인천 남구 주안동에 방사선 진단기와 초음파기기를 가지고 개원하였다. 또한 이원형(李元亨)이 1981년 남구 주안동에 방사선진단기, 초음파진단기와 유방촬영기로 의욕적인 개원을 하였고, 1985년에는 정용인(鄭勇仁)이 부평동에서 개원을 하였다. 제주지역의 방사선촬영기가 들어간 것은 1932년 도립 제주자혜의원이 설립되면서 방전관타입의 X선 기기가 설치되면서부터이고, 1955년에 제주도립병원에 도시바기계가 설치되어 제대로 된 방사선 촬영과 이용이 시작되었다. 최초로 제주도에 방사선과 전문의가 들어간 것은 이유근(李侑根)이 1979년 이유근방사선과를 개원함으로써 방사선과의 역할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 3 인의 개원의가 활동중이다.
   
도약기(1986년 이후)
  서울지역에서는 1980년 중반이후 일반 개원가에 일반X선장치, 투시기 외에 초음파기기를 운영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초기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영상의 질이 가격에 비해 우수했던 일제기기들의 독무대였으나 국산 메디슨 초음파기기의 생산 이후에는 점차 시장판도가 바뀌어 최근에는 메디슨 초음파기기가 개원가에 가장 널리 이용되게 되었다. CT는 1980년대에는 고가장비규제에 묶이어 개원가에서는 설치운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잠시 규제가 허술한 사이에 개원가에 많이 설치되었다. 이때 서울의 세 곳과 광주 등 4개 진단방사선과의원에 MR도 설치되었다. CT는 보험 비급여 항목이기 때문에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가능성으로 앞다투어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다시 규제는 강화되었으나 CT의 보편성과 진단방사선과 개원가의 그룹개원의 경향이 있어 CT 설치조건의 완화를 강력히 요청을 하게 되었고 1992년 이후 방사선과 의사 2인 이상이 상주하는 개원의 경우 설치가 가능하게 되자 각 지역에서 CT를 설치운영하기 위하여 그룹개원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1985년 의료보험 수가산정지침에 "방사선과 특수검사의 판독료는 방사선과 전문의가 상주하는 병,의원에서는 산정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의 판독소견서가 첨부된 경우에만 청구할 수 있다."라는 항목이 삽입됨과 함께 초음파, CT의 운영을 위하여 중소병원급에서도 진단방사선과 전문의를 필요로 하게 되어 진단방사선과 의사의 수요가 확대되었다. 또한 임상진단에 있어서 진단방사선과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의 전문성이 인정되면서 개업가도 좀 더 활기를 찾게 되었고 진단방사선과의 영역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부산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간판이나 진료과목 표시가 방사선과라는 이름으로 많이 바뀌었다. 1989년 이박정(李博正)과 장휘열(章輝烈) 두 사람은 합작으로 개설한 부산방사선과에 처음부터 전신용 CT를 갖추고 성공리에 출발하였다. 1991년 이준형(李埈炯)과 김진욱(金鎭旭), 1993년 김양숙(金良淑), 설창효(薛彰孝), 김옥근(金玉根)이, 1994년 이준배(李濬培)와 김진규(金鎭圭)가 함께 개원하여 각각 CT 등 각종 진단방사선과 장비를 갖추고 진료에 임하고 있다. 현재 부산지역의 개원의는 총 19명이며 이 중 4곳이 2인 이상이 함께 그룹개원을 하고 있는 곳이다. 부산지역을 제외한 경남지역에는 김해에 박연원(朴淵遠), 마산에 제삼록 등 5인, 밀양에 박청길(朴靑吉), 울산에 신승구(辛承具) 등 5인, 진주에 서정혁(徐廷赫), 진해에 이전기(李全基), 창원에 안상원(安相沅), 이재석(李在석), 통영에 이 현(李 현), 함안에 이춘근(李春根) 등 18인이 개원을 하고 있다.
  대구지역에는 현재 13인의 개원의가 활동하고 있으며 이 중 2곳이 그룹개원을 하고 있다. 대구를 제외한 경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원의는 김천에 허 석(許 석), 구미에 백대일(白大一), 서준수(徐俊洙), 안동에 권세홍(權世洪), 포항에 신 욱(申 旭), 우원호(禹元浩), 이용준(李庸準) 등 7인이 있다. 인천지역에서는 1990년 이관세(李寬世)가 여운붕의 시민X선과를 인수하여 개원가에 합류하였다. 인천시내 진단방사선과의원에서는 CT나 MRI등의 고가 장비가 없어 지역 병,의원에서 대규모 종합병원에 의뢰하여야 하는 불편을 해소하려고 이관세 등 진단방사선과 개원의 8인이 1994년 8월 공동출자하여 인천 시청근처 구월동에 인천영상진단센타를 개설하여 Spiral CT를 도입 가동하였다. 고가장비를 공동 출자라는 방법에 의하여 효과적인 운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개업 형태이며 박청희(朴淸姬)가 상주 근무하고 있다. 그 밖에 경기지역에는 수원에 장일정(張一正), 안관식(安寬植) 등 4인, 부천에 김보용(金甫庸) 등 4인, 성남에 구순회(具順會), 이관우(이관우) 등 5인, 안산에 전순애(全順愛), 최정환(崔正煥) 등 4인, 안양에 백성모(白性模), 심중섭(沈重燮), 임귀엽(任貴燁), 광명에 이민정(李旼貞), 임 준(林 準), 추성이(秋省伊), 고양에 유윤정(柳潤政), 채유순(蔡侑順), 구리에 문장호(문장호), 이미숙(李美淑), 의정부에 안정숙(安貞淑), 최정연(崔楨延), 평택에 윤영자(尹英子) 등 33인(인천지역 포함)이 개업중에 있다. 광주지역에는 권충식, 천명철, 최은식 외 17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중 2곳이 그룹개원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 밖의 전남지역에는 목포에 서한태, 정현섭(鄭賢燮) 등 4인, 순천에 강태원(姜泰遠), 전현우, 한동기(韓東奇), 여수에 변명호(邊明淏), 서영준(徐永俊)이 개업을 하고 있다. 대전지역에서는 현재 13인의 개원의가 있으며 이 중 3곳이 그룹개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전을 제외한 충남지역의 개원의는 천안에 김병태(金秉泰), 김완진(金完鎭), 정세영(鄭世永) 등, 다른 지역에 3인이 활동하고 있어 6인이 있다.
  충청북도에는 청주에 이길석, 임상용(林尙容), 정진흥(鄭鎭興), 충주에 권오청(權五淸), 제천에 김동진(金東鎭), 조휘율(趙彙栗) 등 6인이 개원의로 활동 중이다. 전라북도지역에는 전주에 양병철, 강희태(姜熺泰) 등 4인, 군산에 오종현, 윤여성(尹汝聖), 이리에 손형국(손형국), 양승문(梁承汶), 이후용, 정주에 이수일(이수일) 등 10인이 활동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에는 계종식(계종식), 심재욱(沈載昱), 오영호(吳英浩), 춘천에 권재윤(權哉閏), 김 연(김연), 강릉에 성정호(성정호) 등 6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제주도에는 이영중(李榮中), 임 덕(林德), 최용대(崔龍大)들이 개업가에서 활약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