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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회지
   
창간
  대한방사선의학회는 1960년부터 학회지를 발간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재정문제로 계속 미루어오다 1964년 5월에 창간호를 "大韓放射線醫學會雜誌"라는 학술지명으로 발행하였다. 발행인은 이 당시 학회장인 안치열(安治烈)이었으며 중앙의학사가 편집대행 및 인쇄를 담당하였다. 창간호에는 조중삼의 "韓國 放射線醫學界의 古今", 강석린의 "Splenoportography 113例의 X-線學的 硏究" 등의 논문 10편이 발표되었다. 이중 "한국 방사선의학계의 고금"은 일제 치하에서의 방사선의학의 태동에서부터 1964년 당시까지의 역사를 연대기적 기술을 한 것으로서 오늘날 역사의 발굴 작업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간호부터 제7권 (1971년)까지는 매년 1권씩을 발행하였는데 논문의 수를 보면 제2권에는 8편, 제3권에는 6편, 제4권에는 5편, 제5권에는 5편으로 줄다가 제6권부터 12편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여 제7권에는 19편으로 증가하였다. 제7권까지 게재된 논문의 분야별로 보면 흉부X선 등의 단순촬영소견에 관한 논문이 14편으로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은 바리움을 이용한 위장관 분야, X선 치료 분야, 폐용적 등의 정상치 계측 분야의 순이었다.
   
대한방사선의학회지로의 개칭
  1) 1970년대
  1972년 제8권부터 당시의 발행인이었던 박용휘의 주도하에 학술지명을 "대한방사선의학회지"로 개칭하면서 표지의 색깔도 과거의 흰 바탕의 검은 글씨에서 바탕이 주황색으로 바뀌었고 아울러 사진이 게재되는 페이지를 아트지를 사용하여 인쇄함으로써 화보의 선명성을 제고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학술지의 발행도 계간으로 연4호를 내었으나 그 다음해부터는 1980년까지 연2회로 줄이게 되었다. 1977년부터는 전 페이지를 아트지로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논문의 내용별로 보면 단순촬영, 바리움조영술, 경정맥조영술 등의 연구가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970대 중반부터는 Seldinger 방법을 사용한 혈관조영술에 관한 논문이 게재되기 시작하여 이후로 급속히 증가하였다. 1977년의 13권 1호에는 한만청 등의 "心脈管 撮影術 618例에 關한 考察"이 게재되어 카테타를 사용한 심맥관조영술이 궤도에 올라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방사선학적 검사가 다양하여지면서 침습적이고 수술적 준비를 요하는 검사들이 점차 증가 하게 되었는데 이를 반영한 1974년의 제10권 2호에 오용호의 "特殊針을 使用한 經皮經肝膽管造影術" 등이 있다. 1978년의 14권 2호에는 한만청 등이 중재적방사선과학의 국내 임상시술의 시초가 되는 잔류담석 제거, 간동맥색전술 등의 증례와 함께 "行動的放射線科學"이라는 새로운 용어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는 대한방사선의학회에 중재적방사선과학을 도입하는 시발점이었다. 또한, 같은 책에 김순용 등의 "腹部淋巴節의 電算化斷層撮影"이 발표되어 CT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 되었다. 1979년의 제15권 2호에는 김주완(金周完) 등이 "超音波診斷 自驗 1018例에 關한 考察" 을 발표하여 초음파진단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 되었다.
  2) 계간지 및 격월간지 시대
  원고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연 4호로 계간지로 출간하였고 1985년부터 1993년까지는 격월간지로 출간을 하였다. 1983년의 19권 4호부터 논문의 편집을 장기별로 구분하여 하기 시작하였고 1984년부터 동물을 이용한 실험적 연구와 중재적시술에 관한 논문이 급속으로 증가하여 연구의 내용이 다양화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박재형 등은 "心臟의 心電圖誘導 磁氣共鳴影像術 - 正常心臟의 所見" 을 게재하여 본 학술지에 게재된 첫 자기공명영상에 관한 논문이 되었다. 이와 아울러 방사선과학 분야에 있어서 컴퓨터의 응용에 관한 논문이 게재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이 시기의 논문의 주종은 초음파, CT 등의 단면영상으로서 1970년대의 단순X선촬영 등의 투사영상이 주가 되었던 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학회지의 투고 규정은 1991년에 당시 서정호(徐廷鎬) 편집위원장의 주도하에 Vancouver의 세계 의학학술지 편집자 회의의 권장사항에 맞추어서 개정하였고 이어서 1994년에 일부 추가 개정을 하였다. 1991년에는 과거의 최신의학사에서 성림각으로 출판사를 바꾸면서 디지털주사식(digital scanning)방법을 시용하면서 화질의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3) 월간지 시대
  회원들의 연구 논문이 꾸준한 질적 향상과 아울러 양적으로 팽창됨에 따라 함창곡(咸蒼谷)이 편집위원장을 맡은 1994년 제30권부터는 학회지를 월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아울러서 학회지의 크기도 과거의 46배판(18.5x25.5cm)에서 국배판(20.5x28cm)으로 대형화하였으며 표지도 전면 개편하였고 사진도 질적인 면에서 국제 학술지에 손색이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편집위원회의 구성 및 원고 심사제도
  1) 편집위원회의 구성
  1964년 창간호 발행 당시에는 학회장이 발행인, 학술간사가 편집인이 되었고 편집위원은 선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중앙의학사가 편집을 대행하였다. 제3권부터는 편집인도 학회지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발행인인 학회장이 모든 편집업무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편집위원 명단은 1972년 제8권(발행인: 박용휘) 발행부터 선정되어 편집업무를 담당하였다. 편집위원회는 강석린, 권충식(權忠植), 김병수(金炳洙), 김희섭(金熙涉), 박수성, 박용휘, 서철성(徐哲星), 안치열, 유호준(柳浩濬), 최병숙(崔炳肅), 한만청 등 11인이었다. 그 이후 1981년 제17권 1호까지는 위의 편집위원들에 2-3인의 경질로 8-11인의 편집위원이 선임되어 업무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들 편집위원이 실무를 담당하였던 것은 아니며 다소 명예적인 의미가 부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 대한방사선의학회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김건상, 김춘열, 김호균, 박찬일, 서정호, 연경모, 이도행, 이정식, 정규병, 함창곡 등 10명의 새로운 편집위원을 선임하였고 1981년도 위원장에 서정호, 1982년도 위원장에 함창곡을 위촉하였다. 1983년 상임이사제 도입후 학술,간행이사는 김춘열이 새로운 편집위원장으로, 서정호를 간사로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임재훈이 편집위원에 추가되었다.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투고된 원고중 2편이 처음으로 심사에 의하여 게재불가로 판정되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서정호가 편집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간사로 연경모가 선임되었다. 서정호는 1993년까지 7년간 편집위원장직을 역임하였고 재임기간중 원고의 심사제도를 정착시켰으며 심사위원의 워크ㅅ을 통한 심사위원의 자질향상을 꾀하였고 1988년까지의 대한방사선의학회지 색인집을 제작하였으며 투고규정을 개정 국제화하였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는 연경모, 이종태가 간사직을 분담하였고 편집위원을 총 28명으로 구성하여 편집위원들에게만 논문을 심사케 하는 단일심사제도를 채택하였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는 간사를 이종태가 맡고 편집위원 수를 11명으로 감축하였으며 60-70명의 분야별 심사위원을 위촉하여 심사위원의 1차 심사와 편집위원의 2차 심사를 통한 2중심사제도를 채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3년 편집위원장으로 함창곡이 위촉되어 간사 임정기를 포함하여 편집위원을 15명으로 구성하였다. 각 편집위원의 업무는 자기의 세부전공 분야에 따라 구분되었으며 신경 및 두경부에 장기현, 김동익(金東翼), 이남준(李南俊), 흉부에 임정기, 강덕식(姜德植), 이경수(李慶洙), 심혈관 및 중재적시술에 윤엽, 송호영, 복부에 임재훈, 김기황(金基滉), 조영덕, 하현권(河賢權), 소아에 김인원, 근골격계에 강흥식(姜興植), 일반방사선 분야에 함창곡, 유방에 임정기 등이 담당하였다. 동 편집위원팀은 대한방사선의학회 50년사 편찬위원회의 역할을 동시에 맡아서 수행하고 있다.
  표 2-3-4. 대한방사선의학회지 역대 편집위원 명단
 
연도 위원장 및 간사 편집 위원
1972
강석린, 권충식, 김병수, 김희섭, 박수성, 박용휘, 서철성,송문갑, 안치열, 최병숙, 한만청
1974
강석린, 권충식, 김병수, 김희섭, 박수성, 박용휘, 서철성,안치열, 유호준, 최병숙, 한만청
1975
강석린, 권충식, 김순용, 김병수, 김희섭, 박수성, 박용휘,유호준, 최병숙, 한만청
1978
강석린, 김순용, 김병수, 김희섭, 박수성, 박용휘, 박창윤,한만청
1981
김건상, 김춘열, 김호균, 박찬일, 서정호, 연경모, 이도행,이정식, 정규병, 함창곡
1983
김건상, 김기정, 김춘열, 박찬일, 서정호, 연경모,이정식,임재훈, 정규병, 한창열, 함창곡
1984 김춘열
(위원장)
서정호(간사)
김건상, 김기정, 박찬일, 연경모,이정식, 임재훈, 정규병, 한창열, 함창곡
1985 김춘열
(위원장)
서정호(간사)
김건상, 연경모, 이정식, 임재훈,정규병, 최득린, 한창열, 함창곡
1987 서정호
(위원장)
연경모(간사)
김기환, 김춘열, 배상훈, 박재형,오기근, 이관세, 이선화, 이성우, 이승로, 이정식, 이종태, 임재훈, 임정기,장기현,정규병, 차인호, 최규옥
1988 서정호
(위원장)
연경모(간사)
이종태(간사)
강덕식, 김기환,김병근, 김춘열, 배상훈, 박재형, 설창효, 성기준, 오기근, 이관세, 이병철,이선화, 이성우, 이승로, 이정식, 임재훈, 임정기, 장기현, 정규병, 정현대,조영덕, 차인호, 최규옥, 최기철
1990 서정호
(위원장)
이종태(간사)
박재형, 연경모, 오용호, 임정기,장기현, 정규병, 차인호, 함창곡
1992 서정호
(위원장)
이종태(간사)
박재형, 연경모, 오용호, 임정기,장기현, 정규병, 차인호, 최규호, 함창곡
1994 함창곡
(위원장)
임정기(간사)
강덕식, 강흥식, 김기황, 김동익,김인원, 송호용, 윤 엽, 이경수, 이남준, 임재훈, 장기현, 조영덕, 하현권
  2) 원고의 심사제도
  제출된 원고의 심사는 편집위원장이 선출된 1981년부터이며 이 당시에는 원고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때이라 학회직원이 직접 편집위원에게 원고를 전달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출판가능 여부의 서명을 받거나 일부는 후일 반송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당시의 원고심사는 약식의 심사라 할 수 있으며 제출된 원고에 대하여 출판거부의 예는 없었고 저자 수정 의뢰도 10% 이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원고의 숫자도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논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서는 철저한 심사의 필요성이 있다는 데에 공통된 인식이 있어 원고의 심사는 점차 강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이에 따라 원고 중 수준 미달의 경우 출판이 거부되었고 최근에는 제출된 원고의 95% 이상에 대하여 수정의뢰를 하게 되었다.
  1990년부터는 편집위원의 수를 11명으로 줄이면서 그 임무를 세부전공의 부편집인(외국학술지의 vice editor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심사위원(외국학술지의 reviewer)을 따로 분야별 10인 내외로 총 60-70인을 위촉하여 심사업무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제출된 원고는 분야별 심사위원이 1차 심사를 한 후 해당 분야의 편집위원이 1차 심사위원의 심사의견을 종합하여 2차 심사를 하여 게재 여부를 결정하고 게재가 결정된 원고에 대하여 저자에게 수정 및 보완의 요구를 하게 되었다. 이해 4월에는 편집위원장 서정호의 주도하에 편집위원 및 심사위원을 위한 논문심사 워크샵을 통하여 논문의 작성과 심사에 관한 위원들의 자질향상과 관심 제고를 유도하였다. 이 당시 해외 저명학술지에 많은 논문을 게재한 경험이 있는 위원들의 참여가 심사제도와 운영의 선진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94년 편집위원장 함창곡의 주도하에 2차례의 워크ㅅ을 통하여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의 역할을 전문화 및 구체화하였으며 1995년부터는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의 지침서 및 원고에 대한 등급 평가제도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