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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사선재해 및 사건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인 Roentgen WC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의 방사선이 발견되어 "x-ray"로 명명되고, 3년 후 Curie M에 의하여 라디움의 방사능이 발견된 이래, 이러한 이온화 방사선은 의학적인 영상진단, 암의 치료 뿐 아니라 산업분야에서도 활발히 이용되어 인류의 건강, 복지 그리고 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끼쳐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면의 뒤에는 이온화 방사선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많은 방사선에 의한 재해를 치르게되었다.
문헌에 나와 있는 최초의 방사선 재해로는 1900년 Becquerel이 라디움상자를 양복주머니에 넣고 다닌 2주일 후 피부홍반이 생기고 이는 괴양으로 발전하여 수 주 후에야 치유되었으며, 그 이듬해 Curie P도 손에 라디움에 의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조중삼(趙重參)의 기록에 의하면 스승이던 鈴木元晴(스즈끼 모또하루)와 본인도 이러한 방사선의 피해를 경험하여, 鈴木는 독일 유학시절부터 이미 손의 방사선피부염으로 고생하였고, 조중삼 역시 백혈구감소증으로 요양생활을 한 바 있었다. 1910년경부터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한 방사선 촬영기에 의한 첫 방사선재해로는 1930년 50세 여자 환자가 이틀간에 걸친 5회(매회 5-15분)의 위장투시검사로 인하여 양측 허리에 방사선 궤양이 발생하였고 수 차례 수술을 받은 사건으로 법정문제로까지 비화하였으며, 이는 조병희가 1937년 조선뢴트겐협회지에 발표하였다. 그 후 주로 방사선종사자들에서 여러 차례의 방사선재해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의료계 뿐 아니라 방사선을 다루는 산업계 종사자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온화 방사선은 발암인자 중의 하나로서 인식되고 있으며, 일찍이 Curie M와 그녀의 딸이 반복되는 방사능의 실험으로 인하여 피폭에 의한 백혈병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뉴욕의 치과의사가 35년간의 방사선 사진촬영 후 노출된 손가락에 피부암이 발생하여 수술로 절단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있었으며, 최초의 보고로는 역시 조중삼의 '우리 나라 방사선의학회의 연혁'에 기록된 것으로 해방전 이북(사리원도립병원, 철원도립병원 및 평강결핵요양소)에서 방사선 기사로 일하던 박승준(朴勝駿)이 발의 무좀을 치료할 목적으로 방사선조사를 반복한 끝에 발에 만성피부염이 발생하고, 해방후 청주도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피부암이 발생하여 다리를 절단하였으나 암이 전이되어 1955년 사망하였다. 또한 용산철도병원의 방사선 심부치료실에서 근무하던 방사선사인 고흥규(高興奎)가 근무 9년만인 1954년 왼발에 피부염이 생기고, 그후 백혈구감소증과 더불어 피부암으로 발전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절단수술에도 불구하고 복부로 전이되어 1957년 사망하였다.
그 후 이와 유사한 방사선재해가 뒤따라 일어났으며, 1973년 의학신보에 실린 바에 따르면 1939년 경성제대 방사선과의 기사로 출발하여 35년간 기사로 일하였던 장석희와 전남대학병원 방사선사인 김현철이 방사선에 의한 백혈구감소증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방사선 피폭이 아닌, 방사선 진료업무중에 생긴 간접적인 사고로는 1919년 서울에서 위장검사때 투여한 황산바리움(BaSO4)으로 인한 중독사 사건으로 불순품의 오용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되어지며, 또한 1940년대 이전의 방전보호장치가 미비한 촬영기의 조작중 발생한 고압감전사로 법정소송에 이른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방사선 의료행위에 따른 위험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1962년 의료법 시행규칙 제8장 진료방사선위해의 방지에 관한 법제정이 있게 되었다.(의학신보 1962년 5월 10일) 또한 1972년 방사선사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국의 보건소 뿐 아니라 개업가의 방사선 기자재가 노후되어 이에 종사하는 방사선사들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으며,(의학신보 114호, 1972) 따라서 당시 대한방사선사협회장이던 조태형은 노후장비의 교체, 방어용구의 보완과 산업보건협회 산하 병원에 근무하는 방사선사에 대한 위험수당을 지급해 줄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고 관철이 안될 경우 전국 회원의 촬영거부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의학신보 119호, 1972) 이에 보건사회부는 공무원 수당지급 규정에 따른 방사선 위험수당의 신설을 위해 총무처 및 내무부에 협조요청을 하고,(의학신보 127호, 1972) 서울시는 각 보건소에 비치된 방사선촬영기를 연차적으로 3대씩 교체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의학신보 147호, 1972) 국내 산업분야에서의 첫 재해보고는 서울특별시 모공업검사주식회사에 근무하는 비파괴 용원인 이학봉(25세, 남)과 이오성(25세, 남)이 2년 동안 공사장에서 비파괴검사를 위하여 Ir-192가 들어있는 캡슐을 손으로 만져가며 사진촬영에 종사하다가 손가락 끝이 썩으면서 기억력 및 성기능 감퇴를 호소하고 있으며,(1973년 9원 13일 신문보도) 연이어 유사 증상으로 회사 일을 못하는 종업원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1973년 9월 14일 신문보도) 1980년에 이르러 방사선에 의한 진단 및 치료가 보편화되면서 이 분야의 발전으로 계속 시설은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방사선의 위해를 방지할 근거가 마련되지 못하여 시술자나 환자에게 큰 위험부담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 보건사회부는 의료용 방사선 안전관리법을 제정키로 하였으나(의학신보 935호, 1980) 1994년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방사선 검사가 진단의학에서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조영제의 사용이 급증하였다. 특히 CT의 도입과 혈관촬영술의 보편화는 다량의 조영제를 사용하게 되어 한동안 수용성 조영제에 의한 부작용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CT 또는 요로조영술검사중 조영제의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례들이 잇달아 발생되면서 의료사고로서 진단방사선과 의사들이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비이온성 조영제가 도입되면서 부작용의 사례가 격감되어 고가의 비이온성 조영제가 쉽게 이온성 조영제를 대체하게 되었다. 한편 중재적방사선과학이 보편화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도 드물지 않게 발생되고 있으나 충분한 사전 설명과 우수한 치료효과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는 사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