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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시대별 변천   분야별 변천   인물사   병원별 방사선과의 역사   유관학회 및 단체   방사선 의학산업
 
   필름파동과 대한X선검진협회 창립
   
필름파동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하는 X선 필름의 수급은 해방이후부터 문제가 되어 왔으며 특히 6.25를 겪으면서 민간사회에서 사용되는 필름의 대부분이 군에서 유출되는 것을 사용하던 시기도 있었 다. 당시 국가 전체적으로 외화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때였으므로 모든 수입 기자재는 외환 의 배정을 받아야 했고 배정되어 수입된 일정량의 필름을 모두가 나누어 써야하는 상황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 필름의 수급이 극도로 어렵게 되자 학회 차원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관계요로에 외환배정의 증액, 관세인하, 안정적인 공급 등을 건의하게 되었다. 1963년 11월 11일 대한방사선의학회 간사회의 내용을 보면 당시 수입된 Ansco필름 배정문제 에 대하여 국제양행이 전문의 1인당 14'X17', 10'X12', 8'X10' 필름을 25매 한 박스씩 지정된 가 격으로 배정하여 줄 것을 건의한 것으로 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대한X선의료사업협회
  X선 필름의 정식 수입이 시작되자 일부 악덕상인이 나타나 수입물량을 매점매석하여 가격의 앙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방사선의학회에서는 공정성있는 단체에 수입권을 주도록 보 건사회부에 강력한 요청을 하게 되었고 임의단체인 대한방사선의학회는 자격이 없어 새로운 법인 체를 구성키로 하였다. 1964년 12월 2일자로 보건사회부 장관의 허가를 얻어 사단법인 "대한X선의료사업협회"를 발 족시켰으며 그 후에는 X선 필름의 원활한 공급이 이루어졌다.
   
대한X선검진협회 창립
  1965년부터 점차 증가하고 있는 집단검진자들에 대한 간접촬영필름의 판독에 방사선과 전문의 가 적극 참여할 필요성이 있어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관계요로 즉 보건사회 부, 노동청, 결핵협회, 국회보사분과위원회 등에 진정하였다. 또한 무질서한 간접촬영 판독실태를 바로 잡고 합의된 판독료를 모든 회원들이 지켜주도록 대한방사선의학회 차원에서 노력하였다. 1966년 7월 22일 이사회에서는 X선집단검진쎈터(가칭)에 대한 토의를 하였고 X선간접촬영 판독 위원회를 학회 안에 두고 전문의 회원의 단결과 권익을 옹호하도록 하였으며 권태수, 김주완, 김 희섭이 이를 담당하였다. 1968년 1월 6일 대한방사선의학회 이사회에서 "대한X선진료지도회(가칭)"의 조직에 관한 논의 가 있었으며 1968년 1월 21일 대한X선의료사업협회 임시총회를 열어 새로운 법인체의 구성보다 대한X선의료사업협회의 정관을 개정하여 새로운 목적사업을 하기로 의결하였다. 1968년 2월 21 일부로 보건사회부장관으로부터 "대한X선검진협회" 정관 개정허가를 얻어 첫 임시총회를 서울대 학병원 구내식당에서 22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초대 회장에 주동운, 부회장에 권태 수와 김희섭이 선출되었고 이사에 김재섭, 김주완, 박수성, 박용휘, 유호준, 최병숙이 감사에 장기 완, 천세영이 위촉되었다.
   
대한X선검진협회의 역할
  1968년초에 설립된 대한X선검진협회의 초기에는 회원들의 단합이 가장 큰 문제였으며 이를 위하여 집행부가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였다. 회원들의 협조는 만족할만한 것이었으며 대한방사 선의학회의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판독료에 의한 일부 수익금이 대한방사선의학회의 발 전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