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크기글자크기 zoomin zoomout
연표   시대별 변천   분야별 변천   인물사   병원별 방사선과의 역사   유관학회 및 단체   방사선 의학산업
 
   6.25동란과 서양학문의 도입
   
6.25동란의 발발
  6.25동란은 우리 나라 의학의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되었으며 방사선과 역시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방사선과에 종사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군의 방사선과 진료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부현은 월북 후 사망하였고 교직에 있었던 김동창은 납북되었다. 조중삼은 마산결핵요양소에 근무하게 되었고 주동운은 공군에 입대하였으며 군에 재임중 부산의 임시교사에서 강의를 하였다. 김정진은 1950년 12월에 육군에 입대하였으며 군의학교로 발령되어 전역할 때까지 방사선과 기술하사관 교육에 전념하였는데 이 기간 중 미군용 교육자료를 직접 번역하여 우리말 교재를 만들었고 약 300명의 방사선과 기술하사관을 교육하여 군 집단검진에 투입하였으며 이들은 후에 전역하여 많은 종합병원의 기사장들로서 사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군내 방사선과 군의관 교육과 집단검진반
  사변중 1952년 8월 안치열과 이경룡(李鏡龍)이 군령에 의하여 미국 San Francisco 소재 Letterman육군병원과 Texas 소재 육군병원에 각각 파견되어 6개월간 방사선과 교육을 받은 후 귀국하였다. 1953년 7-8월경부터 X선 군의관 양성교육이 있게 되자 안치열은 대구 제1육군병원에서 안병선(安炳善), 이면상(李冕相), 남우선(南佑善), 이교웅(李敎雄, 현재 산부인과 개업), 이항복, 안영하(安泳夏) 6명을 1차로 3개월간 수련시켰고, 2차로 이돈영, 김종숙(金鍾琡;후에 내과전공) 등을 수련시켰다. 이경룡은 부산 제2육군병원에서 윤종섭(尹琮燮), 윤종덕(尹琮悳), 원세재(元世載, 경방 의무실 근무), 손정균(사망), 김종우(金鍾宇) 등을 3개월간 수련시켰다. 휴전에 즈음하여 신규 입대 장병에 대하여 입소신검이 있어 폐결핵에 대한 집단검진을 실시한 결과 현역병에서 결핵환자가 많이 발생되어 크게 문제가 되자 안치열이 중심이 되어 62만 여명에 대한 집단검진이 10개월에 걸쳐 시행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안치열은 다른 15명의 군의관을 교육하여 군의학교에서 교육 배출된 기술하사관 300여명, 의정장교 수십명과 함께 15개 팀을 구성 전국의 군부대를 순회하며 촬영하였는데 당시 대부분의 병력이 일선에 배치되어 있어 집단검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사용한 간접촬영기는 일본 島津(시마즈)제작소 제품 15대였으며 주로 발전기를 장착한 군용 GMC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야전에서 촬영하였다.
  이때 검진반에 참여하였던 박수성(朴琇誠), 윤종섭, 김래준(金來俊) 등은 후에 방사선과를 전공하였고 양만규, 원세재, 양재건 등은 다른 전문과목으로 전공을 바꾸어 의업을 계속하였다. 검진반외에도 서한태(徐漢泰), 박용휘(朴龍輝) 등이 제1육군병원에 파견되어 방사선과 교육을 받았다. 6.25전쟁중 남하한 김순용(金舜鏞)은 문관의사로서 일선부대에 근무하던 중 1952년 안치열을 만나 대구로 왔으며 그곳에서 역시 문관으로 방사선과 진료를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최영윤(崔榮潤), 조병희(趙炳熙), 여운붕(呂雲鵬), 김재섭(金在燮) 등이 군에서 방사선진료를 담당하였던 사람들이며 이들중 다수는 후에 교육병원에서 후진양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일부는 개업하거나 다른 과로 전공을 바꾸기도 하였다.
  하였다. 그는 7개월 뒤 1957년 2월 가톨릭의과대학이 개교하자 역시 방사선과학교실을 창설하였다. 1963년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크게 대두되면서 1959년 창설되었던 원자력원에 방사선의학연구소 및 부속병원이 개설되자 초대 소장으로 부임하였다. 원자력원은 후에 원자력청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안치열이 1968년 원자력청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1970년에는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으로, 1980년에는 경희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한 바 있으며 1979년 치료방사선과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1986년 대한치료방사선과학회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끊임없이 학회발전에 주력하였다.
   
방사선과 의사의 해외 유학 및 유학파의 귀국
  6.25를 통해 우리 나라도 서양의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발전된 서양의학을 현지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이 높아 많은 젊은 의사들이 주로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들중 일부는 방사선과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약하였고 일부는 국내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6년 세브란스 출신 안승봉(安承鳳)이 첫번째로 미국방사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2년 뒤 귀국하여 모교에서 첫 정식주임교수겸 과장으로 취임하여 방사선의학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1970년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8년 역시 미국에서 방사선과학을 공부하던 강석린(姜錫麟)이 국립의료원의 개원과 함께 귀국하여 외국인들과 권태수(權泰洙)와 함께 진료를 하였으며 모든 방사선 특수검사를 방사선과 의사가 직접 시행하는 스칸디나비아 방식에 따라 Seldinger 방식에 의한 혈관조영술을 내국인 의사로서는 우리 나라에서 그가 처음으로 시술하였다. 1960년 김응호(金應浩)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가톨릭의과대학 방사선과에 재직하면서 각종 학술활동에 참여하다 1966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61년에는 세브란스의 이규환(李圭煥) 역시 귀국하여 방사선과에서 교육과 진료를 담당하였으나 1964년말에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신경방사선과학계에서 인정받는 인물로서 Philadelphia의 Thomas Jefferson, Houston의 University of Texas, Health Science Center 등에 근무하면서 서정호(徐廷鎬)를 비롯한 우리 나라 신경방사선과학 전공자들을 초청, 유학의 길을 제공하여 주었고 틈틈이 귀국하여 강의 등으로 새로운 분야를 소개 국내 신경방사선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3년에는 신명수(申命秀)가 미국으로부터, 유두열(劉斗烈)이 독일로부터 각각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의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유두열은 가정사정으로 곧 다시 독일로 떠났고 신명수 역시 6년 뒤인 1969년 사직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 외에도 현재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권충식(權忠植), 김순용, 김용현(金龍鉉), 김주완(金周完), 박용휘, 박창윤(朴昌潤), 서철성(徐哲星), 우원형(禹元亨), 주동운 등은 1950년대에 장·단기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사람들이다.
의과대학 및 의학교육
  1950년대에 가톨릭의과대학과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이 신설되자 전국에 8개 의과대학이 있게 되었다. 가톨릭의과대학에는 안치열이 초대 주임교수를 맡았으며, 1960년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김응호가, 1963년에는 김종우가, 1968년에는 박용휘가 주임교수로 부임하여 교실을 이끌었다.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는 1956년 신승우(申勝雨)가 주임교수로 부임하여 방사선과를 개설하였으며 1966년 김병수(金炳洙)가 합세하였다.
  한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과에서는 1955년 조교수 김주완을 자매결연병원인 Minnesota대학병원에 파견하였으며 2년반 후인 1957년 미국방사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후 귀국하였다. 교실 근무중 그는 군에 징집되어 단기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귀하여 주동운과 함께 교육에 참여하였다. 1963년 신명수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약 6년간 조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유두열, 임종원(林鍾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조교, 전임강사의 신분으로 단기간 교실원으로 활약하였다. 연세대학병원에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3년간 학생들에 대한 강의는 외래강사인 권태수, 변효현(卞孝鉉)이 전담하였고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호주인 Burges JN이 방사선과의 명예과장으로 봉직하면서 강의를 전담하였다. 미국에서 방사선의학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귀국한 안승봉이 1958년 주임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진단, 치료, 핵의학을 전담하는 한편 방사선과학에 대한 강의도 담당하는 등 교실 전반을 꾸려나갔다. 1961년 이규환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강의를 담당하다 1964년 부교수로 사임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61년 8월 최병숙(崔炳肅), 1962년 천세영(千世榮)이 각각 강사로 부임하여 강의를 분담하였다. 1970년 교수 안승봉이 사직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후 최병숙이 주임교수로 취임하여 교실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수도의과대학에는 1957년 장기완(張基完)이 입국하여 강의를 시작하였고 이어 김용현, 이교락(李校洛) 등이 잠시 머문 후 유호준(柳浩濬)이 입국하여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할 때까지 교실을 이끌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는 1953년 김정진이 주임교수로 부임하여 1956년 입국한 천명철(千命哲)과 함께 근무하다 1961년 사임하였고 1957년 권충식과 박용휘가 입국하였으나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후에 권충식이 주임교수가 되어 1976년까지 교실을 이끌었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는 1954년 김순용이 주임교수로 취임하였고 1964년 미국에서 귀국한 우원형이 1969년 김순용이 사임한 후 잠시 주임교수를 지내고 1971년 서울로 옮겼다.
  이화여자대학교에는 1956년 김희섭이 군에서 제대한 후 부임하여 강의를 맡았으며 1957년 방사선과를 창설하여 주임교수가 되었고 1986년 정년퇴임때까지 교실을 이끌었다. 1970년 이화의대출신 이정식(李丁植)이 강사로 입국하여 교육 및 진료를 도왔다.
  1963년 처음으로 의사국가고시에 방사선과학이 분리 출제되어 의과대학에서의 방사선과학 강의의 중요성이 증가되었다.
   
외국의 의료지원
  한편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우리 나라의 의료시설을 지원하고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원조를 하였다. 1954년 부산에 서독병원이, 대구 경북대학병원에 스위스 방사선과 의료진이 파견되었고 부산에 스웨덴, 노르웨이 병원선이 파견되어 진료하였다. 부산 서독병원에서는 Graumann HW의 지도하에 신승우와 윤종덕이 근무하였으며 후에 신승우는 부산대학병원에 방사선과를 창설하여 후진양성에 노력하였고 윤종덕은 개업하였다. 대구경북대학병원에서는 Ludin H이 근무하면서 김순용 등에게 많은 학문적 도움을 주었다. 1958년 서울 을지로 6가에 국립의료원(National Medical Center)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스칸디나비아 3국의 공동출자로 설립되었으며 각종 첨단의료장비와 자국의 우수한 의료인력의 지원으로 우리 나라 방사선의학 발전에 역시 크게 기여하였다. 스웨덴의 위장방사선학의 대가 Lilja B가 초대과장으로 부임하였고 2대 과장에는 족관절 골절의 대가인 덴마크인 Hansen L이 취임하였다. 당시에 설치된 의료장비로서는 독일 Siemens사 및 스웨덴의 Elemma-Sch enander사의 기계들로서 위장투시용 2대, 혈관촬영기 1대, 단층촬영기 2대, 두부촬영기 2대, 일반촬영기 3대 등이었고 기타 이동촬영기가 여러 대 있었다. 그 외에 부속장비로서 rapid film changer와 폭 30cm짜리 role film changer 1대, 그리고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모델인 AOT cut film changer 1대가 있었다. 모두 초당 6매 촬영이 가능한 장비였으며 role film changer는 주로 심장검사나 splenoportography에 주로 사용하였고 AOT는 기타 혈관조영술에 사용하였다. 뇌혈관조영술은 카세트를 미리 장착해 놓고 수동으로 기사가 카세트를 한장씩 뽑아 3장이 연속촬영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국립의료원의 방사선과는 스칸디나비아 방식에 따라 방사선과 의사가 모든 특수검사를 직접 시술하였기 때문에 1958년부터 혈관조영술은 물론, splenoportography, P.T.C.등 침습적 검사가 강석린, 권태수 등에 의하여 직접 시술되었다.
   
방사선재해
  방사선 작업종사자에서의 방사선 재해는 해방 이후에도 여러 건이 있었으며 철도병원 심부치료실 기사였던 고흥규(高興奎)는 차폐막의 결함으로 오른쪽 발이 방사선에 항상 노출되어 근무 9년만인 1954년 피부암이 발생하여 하지를 절단하는 등 치료를 하였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그 밖에도 장기간 근무한 방사선기사들에서 백혈구감소증이 발생되어 오랫동안 고생한 기록들이 있다. 당시에 사용된 치료기는 180kVp, 3mA의 심부치료기였다.
   
학회 조직의 변천
  초창기에는 회원의 수가 적어 회장, 부회장, 그리고 약간의 간사로 학회 집행부를 구성하여 학회를 운영하였다. 1961년 10월 14일 대한방사선의학회 재건총회를 개최하였으며 1948년부터 장기간 회장을 역임한 조중삼 대신 안치열을 새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간 3년이던 회장의 임기를 2년으로 바꾸어 안치열이 7대와 8대회장으로 4년간 재직하였다. 부회장에는 주동운, 간사에 김재섭, 김주완, 김희섭, 박용휘, 신승우, 이규환, 조병희가 선임되었으나 간사에게 고유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1965년 총회에서 주동운이 새 회장에 선출되어 역시 4년간(9대-10대) 회장으로 재직하였고 부회장에는 김희섭이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간사에게 고유 임무가 부여되어 총무간사 김재섭, 섭외간사 안치열, 기획간사 강석린, 학술간사 김응호, 재무간사 김주완, 무임소간사로는 권태수, 권충식, 김순용, 김용현, 최병숙 등 5인, 감사 장기완이 선임되었다. 당시의 회원수는 115명으로 이중 전문의 회원은 74명에 불과하였다. 1966년 간사, 간사회의의 명칭이 각각 이사, 이사회로 바뀌었다.
  1969년에 김희섭이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회장의 임기를 다시 1년으로 개정하고 차기회장제를 도입하였다.
   
방사선장비
  6.25 직후 우리 나라 방사선 기기의 실태는 대단히 미약했다. 큰 병원에 있는 기계들은 일제시대때 사용하던 기기들의 일부와 주한 미군이 사용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후에 외국 의료지원단에서 사용했던 기계들이 불하되기도 하였다. 서울대학병원의 경우 1955년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원조로 새 장비로서는 처음으로 일제 투시촬영기와 단층촬영기를 도입하였고 후에 자체자금 또는 차관자금에 의하여 현대화된 장비들을 도입하게 되었다. 특히 1958년 스팟 장치를 갖춘 미국 GE사의 300 mA 투시촬영기와 200mA의 이동촬영기, 미국 GE사의 maximar 250 kVp 심부치료기가 도입된 후부터 여러 가지 특수촬영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브란스병원에서는 방사선과 고문을 지냈던 Manget이 사재를 들여 30mA Picker 방사선기기를 구입 사용함으로써 방사선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1954년 일본 도시바에서 제작된 방사선촬영기를 K.C.A.C.로부터 기증받아 설치하는등 점차 기계가 보강되었고 1959년에 미국으로부터 라디움이 도입되어 자궁암환자의 치료에 이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960년에는 미국 GE사 제품인 250kVp 심부치료기를 도입, 설치하여 암환자에 대한 심부치료를 시행하는 등 전환기를 이루었다.
  세브란스병원은 1962년 서울역 앞에 위치하던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이 신촌에 있는 연세대학교 구내에 대규모 종합병원으로 신축 이전함으로써 크게 변화했다. 5대의 X선 촬영기, 1대의 심부치료기, 갑상선 기능검사기와 3인치 well형 측정기, 심장기능 검사기기를 도입하고 동위원소실을 개설하는 등 명실공히 대규모 방사선과가 되었다. 1967년 2대의 새로운 방사선장비가 도입되었는데 그중 TV가 부착된 500mA 고속혈관촬영장치는 국내 혈관조영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장비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병원은 1958년 개원한 국립의료원이며 당시 방사선과학의 선진국이었던 스웨덴의 의료지원으로 현대장비가 종류별로 도입되어 설립당시부터 혈관촬영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특수촬영이 이루어졌다. 특히 연속촬영장치와 자동현상기 등은 우리 나라의 다른 병원에 비하여 약 10년 먼저 도입된 것이다.
  한편 해방 이후부터 방사선장비의 수리가 필요했고 이와 함께 기기를 조립생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미 군용장치의 부품을 조립 생산한 것은 1958년 고려X선기계(박양규)의 투시와 촬영이 가능한 30mA기기였다. 성신X-Ray공업사(이성철)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종류의 기계를 생산하였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 당분간 많은 기계가 생산되었고 부품 전문업체도 생겼다. 1960년대 후반에는 회전양극식 튜브에 전자타이머가 부착된 보다 현대화된 기계가 생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경제부흥에 힘입어 외국기계들이 쉽게 도입되면서 국내 생산업계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대한방사선기술학회 독립
   그동안 대한방사선의학회 회원으로 같이 동참하고 있던 방사선사들이 1955년 의사전문의제도가 생기면서 대한방사선기술학회(초대회장 한기성;韓箕星)를 창립하여 분리 독립하였고 대한방사선의학회는 헌장을 개정하여 방사선의학 전공의사만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대한방사선기술학회를 구성하고 있던 방사선사들은 1965년 새로운 법인단체인 대한방사선사협회를 창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초대회장은 허준(許俊)이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