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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시대별 변천   분야별 변천   인물사   병원별 방사선과의 역사   유관학회 및 단체   방사선 의학산업
 
   대한방사선의학회의 창립
   
대한방사선의학회 창립
  해방과 함께 국내 방사선업무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자연히 조선뢴트겐협회는 해체되고 회원으로 활약하던 국내 X선 의사들과 기사들이 다시 모임을 갖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1945년 10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현 국군 서울지구병원) 강당에서 대한방사선의학회 창립총회를 갖고 회장에 이부현(李富鉉), 의사측 부회장에 조중삼(趙重參), 기사측 부회장에 박양규(朴良奎)를 선임하였다. 당시의 40여명의 회원 중 의사는 불과 수 명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이 기사였으나 1955년 대한방사선기술학회가 분리 독립할 때까지 방사선의학 및 기술연구 친목단체로서 함께 활동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조중삼이 새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박양규는 유임, 의사부회장에 안치열(安致烈)이 선임되었다.
   
의과대학의 정비 및 교육
  해방 후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에 의하여 경성대학 의학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대학 교육령에 의하여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 광주의학전문학교, 연희의학전문학교가 각각 서울여자의과대학, 국립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국립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후 이화여자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어 평양에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함께 전국에 7개의 의과대학이 있었다.
  각 의과대학에서는 방사선과학의 독립된 강좌가 개설되었으나 과의 교직책임자가 있는 곳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뿐이었다. 해방당시 경성대학 의학부 방사선과에는 김동창(金東昌)이 재직하고 있었으며 이부현은 개업중이었고, 조중삼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재직중이었다. 해방후 조중삼은 잠시 중부보건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1945년말에 서울대학교 방사선과에 입국하여 과장을 맡았다. 1946년 주동운(朱東雲)이 일본 熊本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입국하였고 안치열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阿武保郞(하라 야스로)에게 사사하다 해방후 월남하여 입국하였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김희섭(金熙涉)과 김정진(金楨鎭)도 교실원이 되어 1948-1949년에는 과장에 조중삼, 김동창조교수, 조교4명 등 6명이 근무하였다. 안치열은 1949년 군 결핵검진을 위하여 입대하였다. 세브란스의과대학의 강의는 1944년부터 1946년까지는 경성제대 출신인 이부현이 담당하였고 후임으로 1947년 김종해가 강사로 취임하여 1949년까지 강의를 담당하였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 미국인 Manget F이 방사선과의 고문으로 방사선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나머지 대학들에서의 강의 기록은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조중삼이 시간강사로 출강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없다.
   
기타
  해방부터 6·25사변 사이에 X선 장비가 새로 도입되었다는 기록은 거의 없으며 단지 세브란스병원에서는 1949년에 미국의 Keleket회사 제품인 200mA촬영기를 새로 도입하였고 미8군에서 기증받은 30mA Picker기를 설치하여 가동하였다고 한다.
  1946년 미군 군정청에서 방사선방어법을 만들었으며 이를 위하여 조중삼은 당시 의과대학생이었던 처남 이돈영(李暾永, 후에 방사선과 전문의 됨)에 부탁하여 미국 방사선방어법을 번역하여 이의 기초를 마련토록 하였다.
  1948년경 안치열과 김정진은 약 52,000명에 달하는 죄수의 결핵검진을 실시하였으며 이와 인연이 되어 군의 요청에 따라 1949년 안치열이 군에 입대하여 58,000명의 군인 검진을 실시하였다. 김정진의 석사학위논문은 교수 조중삼의 지도하에 그 당시 실시하였던 "수인의 결핵조사 보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