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크기글자크기 zoomin zoomout
연표   시대별 변천   분야별 변천   인물사   병원별 방사선과의 역사   유관학회 및 단체   방사선 의학산업
 
   조선뢴트겐협회기 (1932 - 1945)
   
방사선과 의사의 증가
  1930년대에 들어서 X선 촬영장치의 설치가 증가됨에 따라 방사선과에 종사하는 의사 및 기사의 수도 많아졌다. 총독부의원 후신인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는 鈴木가 있었고, 밑에 1931년 일본인의사山中英一 (야마나까)가, 1934년에는 이부현(李富鉉), 1937년에는 조중삼이 입국하여 진료를 담당하였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방사선과에는 1935년부터 岡田正彦(오까다 마사히꼬)가, 경성적십자병원 방사선과에는 寺元高(데라모또 다까)가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에는 1930년 X선 기사로서 미국에서 돌아 온 정일사(鄭一史)가 주임으로 근무하였고 1935년에는 고의팔(高義八)이 과원으로 입국하여 잠시 방사선과 일을 전담하였다. 신설된 평양의학전문학교에는 1935년 일본 九州대학 의학부 출신인 原保郞(후에 阿武保郞으로 개명)가 방사선과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방사선과에서는 鈴木의 지도 아래 방사선기사를 양성 배출하였으며 당시 세브란스병원의 X선실을 담당하던 강문집은 외과진료와 강의의 분주한 생활중에 X선을 전담할 기사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이일선을 수련시켜 이를 전임시켰다.
   
조선뢴트겐협회 창립 및 활동
  1927년 당시 일본에서는 의사, 기술자들이 공동으로 동경에 본부를 둔 일본 뢴트겐협회를 창립하여 이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함께 1932년에는 국내 X선업무에 종사하는 한·일인 의사와 기사들이 모여 조선 뢴트겐협회를 창설하여 X선의학과 기술의 연구발전 및 친목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의 鈴木회장을 주축으로 한 조선뢴트겐협회는 회지를 발간하여 학술활동과 교류를 추진하였고 또한 방사선재해에 관한 예방, 관리, 홍보 활동들을 추진하였다.
  이후 조선뢴트겐협회는 일본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여 한때 일본방사선기술학회의 조선지부로 호칭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일본 국내에서는 X선기사와 의사의 대립으로 인해 일본뢴트겐협회는 방사선기술학회와 뢴트겐학회, 방사선의학회 등으로 분열이 되고 상호간의 권익주장 등에 의한 마찰로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다.
  조선뢴트겐협회는 창설 이후 방사선에 관계된 각종 규칙에 대한 개정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36년 2월에 "뢴트겐설치 전격방어 규칙 용어 개정안"을 비롯하여 "뢴트겐선용 고압예방 개정안", "뢴트겐선 재해 예방규칙 개정안"을 마련하고 1937년 일본방사선의학회와 함께 일본국무성에 제출하였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진료 뢴트겐장치의 취제규칙"이 발행되어 해방 전까지 X선장치의 설비 등에 적용되었다. 조선뢴트겐협회는 1932년부터 해방전까지 13년간 운영되면서 초창기 방사선의학과 기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방사선 장애 및 방어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의사, 기사를 망라한 친선단체로 오늘날의 대한영상의학회의 모체가 되었다.
  당시 X선 업무에 종사하던 기사들은 방사선과 의사의 부족으로 인하여 진단업무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그 중 몇 사람은 이러한 것을 계기로 의사 검정고시를 통하여 방사선과 전문의사로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해방전까지 활동한 방사선과 의사는 일인을 포함해 10여명 정도였으며 한국인 X선 업무종사자의 수는 60여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방사선이용 실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gas관구가 radiator에 의한 공기냉각방식인 Coolidge 관구로 바뀌면서 X선발생장치의 많은 발전이 있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을 비롯하여 서울교통병원 등 몇 군데에서는 미비하나마 radium에 의한 방사선치료가 시작되어 X선뿐 아니라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방사선진단 및 치료가 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증대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방사선장해에 대한 인식부족과 방어시설 미비 등 관리적 측면은 등한시되고 있었다.
  1940년대에는 백열과 복사선이 없으며 mA의 조절이 자유로운 Sielex 관구가 사용되어 기계의 조작과 관리가 쉬워지면서 종합병원은 물론 개인병원에까지 X선 기계를 설비하기에 이르렀다. 치료용 장치에도 많은 발전을 가져와 심부치료시설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경성대학 의학부,경성의전 부속의원, 용산철도병원, 평양의전 부속병원 등 해방전까지 전국 (남북한 포함) 30개 의료기관에 총 33대의 X선 치료장치가 가동되었다. 이 당시 성진고주파공장, 흥남질소공장병원, 아오지탄광병원 등의 신설병원 및 대구동산병원, 전주예수병원, 대구도립병원, 광주도립병원, 그리고 서울 및 부산부립병원 등의 기존병원에서 X선과의 활동이 현저하게 활성화되었다.
  해방전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는 독일 Siemens회사제 Tuto-Stabilivolt 심부치료장치, 독일 Pohl-Kiel회사제 Omniskop투시대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 기계는 환자를 움직이지 않고 360도 회전 투시가 가능한 기계였다.
  표 1-1-1. 해방당시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 설치되어 있던 장비 기계명 제조회사(제조국) 용도Omniskop Pohl-Kiel (독일) X선 투시 Bellevue Wapler(미국) 일반촬영기桂(500 mA) 시마즈(島津)(일본) 일반촬영기平安號(1000mA) 시마즈(島津)(일본)일반촬영기Tuto-Stabilivolt Siemens(독일) 심부치료기Therapie Heliodor Siemens(독일)심부치료기Martius's IonimeterSeemann's SpectrographBenosit's ChromonadiometerKymograph
   
집단검진의 시작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사항 중 하나는 35mm 간접촬영장치가 도입되어 X선집단검진이 실시되기 시작한 점인데, 1942년에는 조선결핵예방협회가주관하여 도, 시, 학교보건소 등에 집단검진사업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x선의 이용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방사선의학 교육
  1940년 4월경 처음으로 경성대학 의학부에 방사선의학 강좌가 독립신설되어 제도상 면모를 일신하였고 이어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평양의학전문학교에도 독립된 방사선의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해방전까지는 위의 3개교와 연희의학전문학교 등 4개교에만 방사선의학의 정식강좌가 있었다. 당시 신설된 경성여자전문학교에서는 조중삼이 처음 강의를 담당하였고 이어 이재규(李在圭)가 담당하였다.
   
방사선재해
  조중삼의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鈴木가 손의 방사선피부염으로 고생하였고 조중삼자신도 백혈구감소증으로 요양을 받은 바 있다고 하였다. 피검사자의 방사선 재해의 예로서 1930년 이틀간에 걸쳐 5회(매회5-15분)의 위장투시검사를 받았던 50세 여자환자의 허리에 방사선궤양이 발생하여 법정문제로 비화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또 방사선작업종사자로서는 철원도립병원에 근무하던 방사선기사 박승준(朴勝駿)이 무좀을 치료하기 위하여 방사선조사를 반복한 결과 방사선피부염이 발생되었고 후에 암으로 발전하여 다리절단수술을 받는 등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얼마 후 사망하였다.